[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23 王들의 피난처 공주 공산성
의자왕·고려 현종·조선 인조 ‘피난’
1011년 1월 거란 침입… 현종 호남行
공주절도사 김은부 환대… 음식·보약
나주선 냉대… 남하 접고 다시 공주로
현종, 김은부 딸 셋 모두 왕비 삼아
궁중혼례 폐단 혁파·국정 쇄신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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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산성에서는 세 명의 왕이 피난을 했다. 첫 주인공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함락되자 백제 의자왕이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한 것. 두 번째는 고려 현종, 세 번째는 조선의 인조. 사진은 공산성 입구에서 본 전경. 문화재청 제공
▲ 명국삼장비
▲ 쌍수정
▲ 공북루
[충청투데이] '왕들의 피난처'- 공주 공산성을 그렇게 불러도 될 만하다. 이곳에서 세 명의 왕이 피난을 했기 때문이다. 그 첫 주인공은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함락되자 백제 의자왕이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한 것. 두 번째는 고려 현종, 세 번째는 조선의 인조.

먼저 고려 현종부터 이야기를 해본다. 그는 공주에서 피난을 하는 동안 이곳에서 3명의 왕비도 얻었으니 공주는 그의 처갓집이나 마찬가지다. 1010년 현종 즉위 1년에 북쪽 오랑캐 거란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국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지만 10만이 넘는 대국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현종은 1011년 1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피난을 나섰다.

목표는 호남. 그의 행차가 공주 인근을 지날 즈음 공주 절도사(지방장관) 김은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성대하게 맞이했다. 그 뿐만 아니라 따뜻한 음식과 보약을 준비해 왕에게 바쳤다. 쫓기는 왕을 이렇듯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공주 절도사에 현종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전주에 도착했을 때는 '쫓기는 왕'이라 냉대를 받았고 지역 유지들로부터 설움도 당했다. 그래서 현종은 나주에 이르러 더 남하하지 않고 말 머리를 돌려 자신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풀었던 공주로 왔다.

마찬가지로 공주 절도사 김은부는 정성을 다해 왕과 그 일행을 대접했다. 그러자 왕은 절도사 김은부에 감읍해 그의 딸 셋을 모두 왕비로 삼았다. 이리하여 첫째 딸은 원성 왕후가 되어 그 몸에서 덕종과 정종을 낳았고, 둘째 딸은 현종의 제3비가 되어 문종을 낳았는데 현종 이후의 고려왕들은 대부분 문종의 후손인을 생각하면 고려왕들에게는 충청도 피가 흐른다고 하겠다. 또한 셋째 딸은 원평왕후의 칭호를 받았다.

어떻게 보면 외침을 당하여 나라가 흥망성쇠의 위기에 부딪혔고 자신도 쫓기는 신세인데 피란처에서 왕비 셋을 맞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 왕실 혼인의 혁명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왕실의 혼인은 집안 친척끼리 하는 근친혼이었다. 그래서 자주 결혼 문제가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현종이 이처럼 왕실 밖과 혼인을 맺은 것은 '족외혼'으로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현종의 피란길은 이렇듯 궁중혼례의 폐단을 혁파하는 계기도 되었지만 국정을 쇄신하는 기회도 주어졌다.

첫째는 국가 안보였다. 특히 북쪽 국경지대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어떤 침략에도 대비하는 것이었다. 특히 현종과 뜻을 함께 했던 고려 영웅 강감찬 장군을 중용했는데 그래서 1016년 거란의 12만 대군이 쳐들어 온 '제3차 침입'을 거뜬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이때 강감찬 장군이 승리를 걷은 ‘귀주대첩'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

두 번째는 개성~양주~전주~나주~공주에 이르는 길고 힘든 피란 생활을 통해 현종은 냉대도 받고 환영도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현장의 민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종은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 돌아와 서정을 쇄신하고 지방조직을 다시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양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이 있듯이 현종의 '고난의 피란 길'은 정치를 펼치는 데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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