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란 충북무심수필문학회 사무처장

봄비가 밤새 몰래 다녀간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로수 길이 더욱 싱그럽다. 잘린 가지 사이에 초록 물감으로 찍은 듯 새살이 돋고, 연초록 여린 잎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봄이 되면 한 번씩 읊조려 보는 성어가 있다.

두보의 시 '춘야희성(春夜喜聲), 내리는 반가운 빗소리'에서 비롯된 성어 '윤물무성(潤物無聲)'이다. '만물을 적시되 소리가 없다'라는 뜻이다.

봄비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밤에 몰래 내려 만물을 적시고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봄비다. 만상에 생명수를 공급해 봄빛 풍경을 만들어 내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아마도 봄비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덕성은 겸손함이요, 섬김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출근을 했다. 내가 입주한 건물은 낡았지만 언제나 깔끔하고 상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직각으로 굽은 허리로 걸어서 이곳을 왔다 가시는 할머니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손자를 키우며 사시는 할머니의 얼굴은 봄비가 온 뒤의 맑은 세상 같다. 그런 할머니의 시야는 구부러진 허리만큼만 보인다. 하지만 애써 보려 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감사히 여기며 사신다.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봄비 같은 사람이다. 학원이 많은 건물이라 학생들이 머물고 간 뒤에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이 흘린 떡볶이 국물을 닦으면서도 인상 한번 쓰지 않는다.

폐지는 모았다가 폐휴지를 줍는 할아버지께 드리고, 쓸 만한 물건이 나오면 필요하겠다 싶은 사람들에게 전화해 주신다. 거친 손에 아무런 대가 없이 보태어 주는 헌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할머니의 삶이 당당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인지 모른다.

늦은 밤 복도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힘들지 않으세요?" 따뜻한 차 한 잔을 드렸다. "일을 그만두고 나면 몸뚱이야 편하겠지. 놀면 무엇 하겠어, 늙은이 용돈도 벌고 건강도 지켜 주니 오히려 고맙지" 하신다.

할머니는 내게 봄비 같은 사람이다. 학원 현관 안쪽까지 들어오셔서 쓸고 닦고는 슬며시 뒤돌아 나가신다. 바닥에 주저앉아 삶의 회한을 털어놓으시며 삶의 지혜도 뿌려 주시고, 용기와 희망을 주며 내 영혼을 촉촉이 적셔 주신다.

행복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은 어떤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작은 것을 나누며 소신 있고 당당하게 사는 아름다운 삶을 보며 내 노후의 여정을 그려 봤다.

봄비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작은 일을 하면서 눈에 띄기를 바라고, 별일 아닌 것에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도 봄비의 '윤물무성(潤物無聲)'의 겸손함을 배워 봄비 같은 사람이 되어 볼 일이다.

늦은 밤 할머니는 아픈 허리를 감추고 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혼자 기다리고 있을 손자 곁을 향했다. 늘 낮추고 살았을 세월 속에 행복을 넣어 다니시는 할머니, 할머니의 보금자리엔 오늘 밤에도 별이 뜰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 달도, 별도 밟고 사는 할머니는 봄비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의 가슴은 언제나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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