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형 을지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딸아이가 이른 새벽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깨우고는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평소 화장실에 가고플 때 꼭 말을 하고 가는 습관이 있는 아이였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다녀오라는 대답에는 '곤히 잠든 나를 굳이 깨워야 했을까' 라는 투정어린 말투가 반쯤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이가 아직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녀오는 동안 혹시 어디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이 올린 채 다시 잠자리에 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볼 일을 본 딸이 화장실 물은 내리지 않고 불만 끄고 나오는 것이었다. 평소에 세 명의 아이들 중 유달리 화장실 예의를 잘 따지는 아이였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다. 그런데 아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울까봐 그냥 나왔어." 물소리 때문에 잠든 가족들이 혹시나 잠에서 깰까봐 화장실 예의를 잠시 미뤄두었던 것이다.

아이의 그 한마디가 가슴 깊이 메아리쳤다. 다섯 살 아이의 세심한 배려가 어색했고, 다시 잠자리에 든 아이의 얼굴에서는 성숙함이 엿보였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다'라는 표현 한 구절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체구는 작아도 생각과 느낌은 다를 수 있기에 아이 또한 한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내 가슴을 콕 찔렀다. '혹시 무심결에 한 나의 행동과 말이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을까, 가장 가깝게 지내는 가족, 그리고 직장에서 함께하는 많은 동료들의 필요에 난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해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벽잠을 설쳐야 했다.

그뿐이랴. 나에게는 진료를 위해 먼 곳에서부터 찾아오는 환자들이 꽤 있다. 아침 일찍부터 수 시간씩 달려오는가 하면, 아이들의 해외 유학이 흔하다 보니 방학 기간을 이용해 오랜 기간 기다렸다가 잠시 방문하는 경우도 있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만나기 위해 수개월 전부터 미리 예약하고 멀리서 찾아왔는데, 과연 난 그들의 필요를 얼마나 헤아려주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편의보다는 그들의 필요에 더 민감해져야겠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방문 당일 충분한 설명은 물론, 검사 결과를 알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해 보았고, 만약 해외로 다시 나가야 한다면 전자 메일 등으로 검사 결과와 함께 아이의 성장과 발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게 개발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이를 통해 체득한 소중한 경험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곤 한다. 아이를 자랑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일일이 기술하지 못하지만 '나 중심화' 모습이 우리 사회에 점점 더 만연해지고 있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복에 대한 간절함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아울러 나는 감히 주장해 본다. 배려의 반대말은 '나 중심'이 아닐까. 배려는 성숙의, '나 중심'은 미숙의 표현이라고 말이다.

어릴 적 읽었던 소설 '빙점'이 생각난다. 한 가족이 겪게 되는 고통스런 과정과 비극적 결말이 다름 아닌 서로간의 배려와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긴 오해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다. '배려의 성숙함이 우리에게 있길 간절히 바란다면 현실을 너무 모르는 사치일까?'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먼저 헤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 일은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가랑비 옷 젖길 바라는 심정으로 난 배려의 초인종을 눌러 본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