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공섭 대전문화원 연합회장

아침이슬은 깨끗하고 투명하며 순수함을 이야기 하는 자연의 대명사다.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 큰 영양을 주며 사막 같은 곳에서는 이슬이 식물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초적 생명수와 같다고 하겠다.

아침이슬을 담아 청정함을 노래로 만들어 불러오다가 1975년 유신 정부의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에 선정된 것으로 유명하다. 2000여 곡은 금지 이유가 있었는데 아침이슬만큼은 금지곡 선정 근거가 없었다.

이후 세간에 알려진 금지곡 선정 이유는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이유다. 헌데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1971년에는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면서 그 시대적 배경이 함께했을 것이라고 유추해 본다.

이슬은 대기 중의 수증기의 양이 고도에 따라 증가할 때 일어나는 수증기의 하강운동이며 지면의 온도가 나뭇잎의 온도보다 높을 때 일어나는 수증기의 상승운동이다. 따라서 이슬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아래쪽으로 확산될 때 형성되는 내림이슬과 지면에서 위쪽으로 확산될 때 형성되는 상승 이슬로 분류 된다.

아침이슬은 말에서 풍겨오는 느낌같이 청정하고 싱그러우며 맑고 투명하고 영롱한 단어로 우리의 마음에 자리 한 지 오래다. 아침이슬이 식물의 기초신진대사를 돕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도 촉촉이 적셔주는 서정적인 생태의 출발점이다.

1411년(태종11) 함주 정주에 감로(甘露)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아침이슬을 즉, 단 이슬로 마치 맛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1436년의 정평과 영흥에 내린 이슬은 그 맛이 꿀과 같이 달았다는 기록은 실로 흥미 있는 일이며 그만큼 아침이슬을 달콤하고 청정하다는 표현일 것이다.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을 것이다. 그 것은 양은 작지만 식물에 주는 영양은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마디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말은 아침이슬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침이슬이 식물의 타는 목을 적셔주는 것과 같이 좋은 말은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준다면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생명수를 마시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슬이 아주 작은 물방울인데도 큰 생명수가 되는 것처럼 좋은 말 한마디로 감동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침이슬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신선한 선물이며 청정한 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빛나는 태양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이슬을 앵글에 담는 작업을 하면 세속에 찌든 마음의 때를 말끔히 벗겨주는 청량 수 같은 역할을 해준다.

아침이슬과 생태계의 지존인 거미가 열심히 작업해서 만든 넓고 정교한 거미의 집(거미줄)과 만나서 자기 집에 초롱이 매달린 아침이슬로 목욕하는 장면을 연출하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순수 생태예술이 탄생한다. 들길의 아침에는 이슬이 가장 먼저 일어난다. 실바람을 머금고 눈을 뜬 이슬이 풀꽃을 흔들어 깨운다. 어서 일어나라고 살며시 이슬 한 방울로 목을 축여준다.

아침 해가 뜨면 헤어 졌다가 만나는 이슬과 풀꽃이기에 그들의 밀어가 애잔함으로 다가 오지만 그 또한 자연의 위대한 순간이다.

사진은 인내의 예술이라고도 하며 기다림의 예술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높은 산, 깊은 계곡 등 피사체를 찾아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고 내리는 일이 반복 될 때 따르는 신체적인 고통을 인내해야 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넉넉함이 있어야 신선한 자연의 주제를 맞이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치는 없고 정치인만 있는 후진적 정치 문화가 세상을 비틀거리게 하고 있으며 내편과 네 편으로 갈라서서 죽기 살기로 서로를 비난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 정치 상황,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혼탁한 리그에, 아침 이슬과 같이 청정하고 싱그러운 자연이 주는 정서적 가치를 함께 공유하고 호흡 한다면 좀 더 상생의 사회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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