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 스님 사)승병장영규대사기념사업회 이사장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는 영규대사 순국 제427주기가 되는 해이다. 대사는 일찍이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며 홀로 무예를 익히고, 서산대사의 문하에서 정법을 닦아 앞으로 닥칠 국난을 대비하셨던 선각자였다.

당시 충청도는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일뿐만 아니라 불타(佛陀)의 인연과도 매우 깊은 신성한 지역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불법(佛法)은 천상(天上), 용궁(龍宮) 그리고 인간(人間)의 3대 역사로 이루고 있는 유일한 불국토(佛國土)이다. 인지하듯이 계룡산 천진보탑은 천상역사(天上歷史)를 통하여 불타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고, 금강산 유점사는 용궁역사(龍宮歷史)를 통하여 53불을 봉안하였으니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이미 신라 제2대 남해왕 즉위 원년에 건립된 도량(道場)이었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 칠불암은 인간역사를 통하여 대장경을 보장(寶藏)하였으니 지금부터 1900여 년 전 가락국 김수로왕 당시에 창건되었고, 갑사는 1700여 년 전 아도화상(阿度和尙)에 의해 개청되었다.

이와 같이 3대 역사를 소장한 조선에 서산대사는 먼저, 영규대사(靈珪大師)를 계룡산에 주석(住錫)하게 하였고 다음은 사명대사를 금강산에 주석시켰으며, 처영대사(處英大師)를 지리산에 그리고 해안대사(海眼大師)는 가야산에 의암대사(義岩大師)는 구월산에 신열대사(信悅大師)는 용문산에 각각 주석하게하고 서산대사 자신은 묘향산에 주석하시며, 장차 국왕을 알현하고 국가대사를 논의하여 국왕을 보호하며, 국난을 평정하려는 국난극복의 대 계책을 수립했던 것이다.

서산대사는 이미 왜적이 침략하면 임금은 의주로 파천(播遷)할 것이고 왜적들은 바로 청주에 대군을 집결시켜 금산(錦山)의 곡창지대를 점령할 때 국가의 존망이 모두 이곳에 달려있음을 간파하고 이처럼 중대한 국가누란의 위기를 감당할 인물이 바로, 영규대사뿐이라고 판단하여 충청도에 주석케 했던 것이다. 영규대사의 청주성 탈환과 금산대전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은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수(將帥)가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승전이었다.

도성을 버리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속에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임진왜란 첫 승전보를 영규대사의 청주성 탈환소식을 접하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의승 진위장군"을 봉하였지만 대사는 이미 3남으로 남하하는 왜적들을 막기 위한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셨다.

그간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이 같은 영규대사의 치적과 빛나는 애국 혼은 역사에서 아예 사라지고 불행하게도 갑사의 부목(負木)이며 천민으로 치부되었지만 전국 6도 방백에 표충사(表忠祠)와 수충사(酬忠祠)를 세워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존영을 봉안하고 예조(禮曹)에 명하여 향사를 지내라는 왕명이 있었는데도 아직도 낭설과 우둔무식한 소인배의 평가가 후인으로서 송구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뒤늦게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에서 전 국민의 발의로 대사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하고자 사)승병장영규대사기념사업회가 창립된다고 하니 산승(山僧)으로서 매우 기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호국불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계기를 만들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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