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장수 유청신(柳淸臣)은 호두나무를 국내에 전파한 인물로 전해진다.

유청신은 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때의 인물이다.

1257년 전라도 고흥에서 태어나 젊은 날을 '부곡(部曲)’이라고 하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관리하는 말단 지방 관리였다.

유청신은 부곡이라 5품 이상은 승진할 수 없었지만, 충렬왕이 특별히 3품까지 승진을 허락해 고흥현으로 승격됐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까지도 좌우할 만큼 권력자가 됐다.

촌락의 아전에 불과했던 그가 권력을 실세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담력이 있던 유청신은 몽고어를 잘했다.

그 무렵 고려에 대해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던 몽고, 원나라는 제주도와 왕래가 빈번했으며 고흥반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에 대한 거래도 활발했다.

해상사고나 무역 분쟁 등 큼직한 사건도 있었을 것이고, 그때 마다 유청신의 몽고어 실력은 큰 빛을 발휘했을 것이다.

고려와 원나라 외교무대까지 오르게 된 유청신은 1290년 충렬왕 16년 원나라에 다녀오는 기회가 생겼다고 한다.

그때 그 곳의 호두를 처음 맛보고 이걸 가져와 고려에 심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유청신은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올 때처럼 원나라의 엄격한 감시를 패해 호두알과 묘목을 짐 속에 숨겨 귀국했다.

그는 들여온 묘목을 지금 충남 천안시 광덕사 인근에 심었는데 다행히 발아가 잘 되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호두나무가 뿌리를 내린 계기다.

그는 왜 고향도 아닌 천안에다 소중한 호두나무를 심었을까?

이에 대한 문헌은 없으나 그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원과의 외교에도 많은 공로를 세우게 되자, 하사 받은 땅이 있던 천안에 호두나무를 심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제기된다.

여기까지는 그가 남긴 업적이 충신에 오를 만큼 평가받을 만 하다. 그러나 유청신은 과거를 잊고 손에 잡힌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그 첫째가 고려를 원나라의 속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을 올린 것.

둘째는 역시 고려 간신으로 오명을 남긴 오잠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숙왕 폐위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속령이 되는 것도 충숭왕 폐위도 모두 실패하고 1329년 이국당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는 고려말기 무능하고 부패한 국정과 왕실의 타락에 실망해서 그런 배반을 했는지 모르지만 '고려사'는 그를 간신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손자 유탁(柳濯)은 달랐다. 유탁은 무신이었으나 학문이 깊고 백성들과 늘 가까이 하려고 했으며 공민왕 초에는 전라도만호로 임명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전공도 많이 세웠다.

마침내 1362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지금이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시중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인생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사단은 그를 신임하던 공민왕에서 비롯됐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 노국공주가 일찍 죽자 공민왕은 너무 슬픔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고 궁녀들과 변태를 부리는 등 그 일탈이 극심했다.

그리곤 마침내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영전을 호화롭게 건축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집행하려고 했다. 유탁은 더 참지 모하고 공민왕에게 재정집행을 취소하도록 간청하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파직과 함께 유배를 당하는 신세가 됐다.

이것도 잠시, 공민왕은 그렇게 아끼던 유탁의 목을 베는 참수형에 처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고려사는 그를 고려 충신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천안 호두과자는 전 국민의 사랑받는 명물이 됐다. 역사는 이렇게 강물처럼 흐른다.

<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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