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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공주시장

3·1운동은 올해 100돌을 맞는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새 나라는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민족 지도자들에게 있어 전제정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공화정을 새 나라의 목표로 삼게 된 계기가 바로 3·1운동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시름하던 우리 민족의 저력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 세계에 보여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 혁명적 사건에서 우리 지역 공주는 충청 지역의 독립운동을 선도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3·1운동에 앞서 반제·반봉건의 기치 아래 일어선 동학농민군의 전투지가 공주의 우금티였고 330년간 충청감영과 충남도청이 주재했던 공주의 의인들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몰린 나라를 위해 일어섰다. 공주 우성 출신 이상린, 이상구, 이칙, 노원섭 등은 항일의병 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으며, 사곡 출신 오강표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아편을 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이어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절명사를 짓고 공주향교 강학루 들보에 목을 매어 순국했다. 계룡 출신 이학순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일본 총독부가 은사금을 전달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생각해 거부했다가 옥에 갇혀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던 중 잠시 석방된 틈을 타 음독자결을 택했다. 유림 이철영은 평생 일제통치를 거부하다 총 70여일을 구금되고 많은 가산을 빼앗겼다.

1919년 공주에서는 3월 14일 유구장터에서 천도교인 황병주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처음으로 시작됐다. 이어 4월 1일에는 공주 읍내를 비롯하여 정안, 사곡, 우성, 의당 등 공주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만 1만여 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특히 공주의 3·1만세운동은 공주의 기독교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도청소재지 공주는 충청지역 포교를 위한 거점지였다. 1905년 파송된 샤프 선교사 부부는 공주에 지금의 영명학교 전신인 명선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앨리스 샤프(사애리시) 선교사는 병천에 살던 유관순을 영명학교에 데려와 2년간 수학시키고 이화학당에 교비장학생으로 편입학시키는 등 유관순에게 근대식 교육을 제공했다. 사애리시 선교사와 공주에서 보낸 2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관순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19년 4월 1일 공주 읍내에서의 만세운동은 기독교 감리교인들, 특히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의 주도로 촉발됐다. 이때 당시 영명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훗날 유관순의 유해를 수습한 김현경도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유공자이다.

3·1운동 이후 공주의 독립운동은 그 맥을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 사회변혁 운동의 형태로 이어간다. 1920년대 공주고보 학생들은 수차례의 동맹휴학을 단행하였고, 농민들은 소작쟁의 등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우리가 잘 아는 임시정부의 수반 백범 김구는 1898년 마곡사에 은거하며 독립의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공주를방문해 세계유산인 마곡사와 공산성에는 그의 발자취가 백범당과 광복루에 남아 있다.

이렇듯 지역의 많은 순국선열들이 이념과 종교, 신분의 차이를 뒤로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마음으로 애썼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다가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은 미진하였고,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공주시에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시민들과 함께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가 서훈 추진, 교재 발간, 항일 유적 답사 및 기념 표석 세우기 등 16개 사업을 준비 중이다. 3·1운동 100주년에 개최되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반도에 영구적 평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동시에 사회 양극화로 고통받는 시민들이 더 행복한 나라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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