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대나무 숲
상태바
[에세이] 대나무 숲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2월 07일 19시 1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2월 08일 금요일
  • 23면
  • 지면보기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지봉 충북NGO센터장
[충청투데이 충청투데이]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48대 경문왕과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있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갑자기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는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문왕과 두건을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경문왕은 세상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지킬 것을 명했지만 두건을 만들던 기술자는 참지 못하고 대나무 숲 한 가운데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그 뒤로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대나무 숲에는 온갖 말들이 넘쳐난다. 그 곳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부터 시작해 비밀을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이들의 다양한 불만이나 애환이 가득 찬 공간이다. 대나무 숲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2012년 9월 익명의 한 출판사 직원이 사장의 차명 재산을 비롯한 회사의 부조리를 공개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출판업계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자 출판사는 직원 단속에 나섰고, 결국 사장이 직원들을 소집했다는 글을 끝으로 계정은 사라졌다. 이후 이 계정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정이 21세기 판 대나무 숲인 출판사 옆 대나무 숲이다. 이 사건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와 방송사 옆 대나무 숲, 시댁 옆 대나무 숲 등 유사한 계정들이 만들어 졌고, 대학가에서도 대나무 숲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권위적인 상하질서,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익명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불만, 불통의 삶에서 숨통을 틔우는 해방구를 마련한 것이다.

비영리 공익조직의 활동가들도 대나무 숲을 소통의 창구로 사용하고 있다. 사직을 고민하는 활동가, 조직을 떠나 다른 길을 가는 활동가와 새로운 장소에서 자기 소신을 이어가는 활동가들의 소리가 담겨져 있다. 다행인 것은 초기지만 많은 조직들에서 문제들을 공론화 하고 다양한 해법을 찾아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대간 함께 일하기, 비전 수립, 조직 컨설팅 등 워크숍을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은 어떤 모습일지. 활동가에게 조직이란 무엇인지. 창의성과 역동성이 발휘되는 유연한 조직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영리 공익조직은 이러한 문제를 대나무 숲에 묻어 두지 않고 해결해 가고자하는 과정 속에서 튼튼하고 지속가능한 조직으로 거듭날 것이다.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나자 대나무 숲을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의 바람과 달리 그 이후에는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누구도 대나무 숲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나는 대나무 숲과 함께 다수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위한 기본으로 민주적으로 말하고 소통하는 것이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튼튼하게 비전을 따라 미션을 수행해 나가는 비영리 공익조직에서는 민주적 소통이 중요한 조직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글을 쓰는 오늘은 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이다.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기도 하다. 아직 겨울 찬바람이 물러가진 않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땅 속에서는 새싹들의 꿈틀거림이 시작되고 개구리도 겨울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우리 모두 따뜻한 봄기운을 맞을 준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