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6 왕들 安眠島운하에 도전하다
왕들의 운하개척도전 줄줄이 실패, 병자호란 후유증에 시달리던 인조
궁여지책으로 재개… 1638년 개통, 태안군, 제주도 다음 ‘큰 섬’ 될뻔…

 

▲ 지금은 최고의 관광지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의 그림 같은 낙조. 하지만 이곳은 왕명도 받아들지지 않는 도도한 곳이었다, 고려부터 조선 인조에 이르기까지 안면도 운하개척에 도전한 것이 열한 번이나 된다. 태안군청 제공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완강히 저항하던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더 버티질 못하고 청태종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항복식을 거행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한 장면이 연출된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임금은 신하를 뜻하는 헐렁한 남색 옷을 걸치고 세자와 함께 절을 할 때 마다 이마를 네 번 땅에 찧는 치욕스런 예를 행했다. 그런 다음 청태종은 세자를 비롯, 많은 인질을 잡아 만주 심양으로 떠났다. 병자호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당장 재정난에 봉착했다. 곳간은 바닥이 났고 파괴되고 불타버린 궁궐과 사찰, 민가 등 상처가 너무 켰다. 인명피해도 막심했다. 우선 호남·충청지방에서 조곡(租穀)을 실은 선박의 조운(漕運)이 시급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쌀을 실은 선박들이 한양으로 올라오다 안흥앞 바다에서 좌초당하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그래서 인조는 한동안 중단됐던 태안의 굴포(堀浦)운하공사를 서둘러 재개하자고 했다. 굴포운하공사는 수 많은 배들이 계속 안흥량에서 거센 물살과 암초에 좌초되자 육지에 바닷길을 내겠다는 것. 지금도 태안읍 인평린 도구에 가면 운하를 뚫다만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당시 이 공사룰 책임 맡은 사람은 충청도 관찰사 김육(1586-1658). 그는 일생을 대동법 완성과 확산에 바친 뛰어난 경세가였는데 인조의 굴포운하건설을 반대하고 대신 지금의 안면도와 태안군 남면을 잇는 부분을 짜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건의 했다.

 

▲ 안면도 전경. 태안군청 제공

 

사실 굴포운하는 고려시대부터 여러 번 시도했다 실패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17대왕 인종은 정습영을 책임자로 굴포운하작업을 지시했으나 땅을 파면 바위가 나오고 조수가 한바탕 밀려 왔다 나가면 작업했던 모든 수로가 묻혀 버리는 바람에 포기했었다. 인력도 수천명이나 동원했었지만 그때의 기술로는 역부족이었다.

그후에도 태안반도의 안전한 항로 개척은 모든 왕들의 숙원사업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1395년부터 60년 동안만 200척의 선박이 이곳에서 좌초됐고 1200명이 죽었으며 1만 6000석의 쌀이 유실되는 사고가 발생했으니 오죽했겠는가. 많은 사람이 죽고 곡식을 수장할 뿐 아니라 전라도 강진, 고흥 등지에서 생산된 고려청자 같은 고급 도자기들마저 이곳에서 수없이 수장됐는데 지금도 안흥 앞 바다에서는 이들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운하개척에 도전한 것이 고려시대부터 조선 인조에 이르기 까지 모두 열한번이나 된다. 심지어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도 고려 때 한 번 시도했고 왕이 되고서 또 착수했으나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 병자호란이라는 극심한 환난을 치른 인조에 이르러 안면도 운하는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니 '궁하면 통한다'는 속담이 실감나는 것 아닌가. 이 공사야 말로 당시 형편으로서는 지상 최대의 국토개발사업이었다.

병자호란으로 조정과 백성 모두 지쳐 있었고 공사를 벌이는데 필요한 자금도 없으면서 수천명을 동원했으니 그 모든 걸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1638년 안면도는 운하가 개통했고 안면도는 우리 나라 여섯 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도 이제 부터는 선박이 좌초되거나 난파당하지 않고 무사히 한양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됐다하여 '安眠島'로 명명했다.

지금도 태안에 가면 옛날 우리 선조들이 '굴포운하' 작업하다 중단된 흔적이 남아 있고, 만약 그때 지금과 같은 기술력이 있어 공사를 끝냈더라면 안면도뿐 아니라 태안군 전체가 섬이 되어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 될뻔했다. 역시 땅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나 보다. 앞으로 안면도가 최고의 관광지로 태어날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충남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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