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우리는 참으로 많을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의문투성이다. 그 중 최대의 미스터리는 인간의 '폐경'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450만 년 전부터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중력을 이기고 균형을 잡느라 뇌신경이 발달하면서 큰 뇌를 가지게 됐다. 직립보행으로 골반은 작아지고, 신생아의 머리는 커지다 보니 인간은 미성숙한 상태로 세상에 나와 오래 성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광장의 비둘기 떼를 보면 새끼 비둘기를 보기가 어렵다. 비둘기 새끼는 알에서 깨어 한 달 정도면 어미를 떠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 보통 20여 년 간 부모의 둥지를 떠나지 않으며, 인생의 1/3을 자식 뒷바라지로 보낸다. 1/20 정도만 새끼를 키우는데 힘을 쏟는 비둘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인생의 1/3을 소비하면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데, 여성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여성이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도움설은 페미니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비판을 받는다. 실생활에서는 남성의 도움보다 할머니, 친척, 이모, 유모 등 다른 여성들이 실질적으로 육아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가설인 할머니가설이다.

거의 모든 동물들은 죽을 때까지 월경과 출산을 한다. 하지만 인간과 범고래, 들쇠고래 등 세 종류의 동물만은 삶의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피임이 되는 폐경, 즉 '유전적 죽음'을 맞이한다. 순전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임신능력이 없는 암컷은 쓸모없는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인간은 늙어서 힘들게 출산하는 것보다 손주를 돌보고, 지혜를 가족에게 나누어 주는 쪽으로 진화했다. 이런 폐경이라는 놀라운 진화가 인류문명을 견인한 것이다.

폐경이 된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수명이 늘어났고 인지능력이 발전하면서 6만 년 전부터는 똑똑한 장수유전자가 전 인류에 퍼졌고, 가족이라는 고유의 문화가 만들어 졌다. 범고래도 굶주림 시기에는 노련한 할머니 범고래들이 무리를 이끌고 연어 사냥을 한다. 수렵채취 시절의 할머니들도 생식활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역량을 발휘하고 무리의 생존을 책임졌다. 어른의 탄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최근 200여 년의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갱년기는 수백만 년 전 폐경이라는 진화를 통해 무리의 생존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가벼운 신체 증상만 있었을 뿐 무엇이 갱년기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21세기는 어른의 역할을 유치원, 학교, 국가 등이 대신하면서 어른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970년 시몬드 보루아르는 어른(노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침묵의 공모'라고 표현했지만,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년, 폐경이라는 주제는 다들 쉬쉬하는 문제처럼 보인다.

30세에 자녀를 출산해 여성나이 45세, 갱년기가 되어보니 15살 사춘기 자녀와 한바탕 전쟁을 치루는 '싸움맘'이 된다.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쯤에는 폐경으로 여성호르몬이 감소되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 설렜던 남편이 성가시게 느껴진다. 20년간 가족에게 헌신하며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남은 것은 빈 둥지뿐이라는 위기가 엄습한다. 심지어 TV 속 여성호르몬 광고에서는 갱년기 여성을 짜증내고 화내는 철부지 아줌마로 폄하하고 있다. 이처럼 21세기 갱년기 여성은 신체 증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가족관계, 정신적, 사회적 문제, 세대 간 혐오까지 시달리면서 환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진화는 시간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빙하기와 같은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변화로 초래된다. 이것이 스티븐 제이굴드의 '단속평행이론'인데, 이런 진화의 원리가 인간의 일생에도 축소되어 적용된다. 인류의 절반인 현대 여성은 인생의 1/3인 폐경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첫 세대가 되었다. 부모세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환경이다.

수렵채취 시절의 할머니들이 폐경이라는 진화를 통해 삶이 자유로워지면서 무리의 어른이 되었던 것처럼, 21세기 새로운 환경과 마주한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진화,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새로운 가치관, 세계관, 건강관의 정립인데,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길을 개척하는 21세기 우리들의 숙명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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