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우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필자가 운전을 처음 배웠을 당시, '비상등'의 용도에 대한 설명을 흥미 있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비상등의 1차적 기능은 비상상황을 알리는 목적이다. 하지만 자동차 학원의 강사 선생님께서는 비상등은 이런 1차적 기능 이외에도 때로는 '고맙다'는 의미로, 때로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면허 취득 이후 운전을 하면서 운전 강사의 설명을 되새길 기회가 많았다.

독일에서 8년 6개월간의 유학 생활을 하면서 종종 운전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처럼 때론 고맙다는 의미로, 때론 미안하다는 의미로 비상등을 켜곤 했다. 그런데 비상등을 켜면 종종 뒤에 있는 차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것을 보곤 한국과의 '다름'을 깨달았다. 독일에서 차량 비상등의 용도는 오직 '비상시'에만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 운전을 시작하면서 10여년 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비상등을 켜는 모습이 많이 줄었다는 것을 체감한다. 비상시에, 때론 고맙다는 의미로, 때로는 미안하다는 의미로 켜주던 비상등의 활용폭이나 이용빈도는 많이 줄어든듯 하다. 우리나라의 운전문화가 독일형으로 바뀐 것인가.

그런 거 같지는 않다. 비상등의 사용빈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은채 차선을 바꾸는 차량 또한 10여년 전에 비해 부쩍 늘어난 것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줄어들고 자기 중심적인 운전문화가 오히려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 문화가 있었다. 두레·품앗씨와 같은 생업과 관련된 형태뿐만이 아니라, 부락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상생의 문화도 있었다. 공동체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자리 잡았고 더불어 살아감이 소중한 삶의 가치였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개인주의'를 넘어 '개인 이기주의'와 '경쟁'이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문화가 형성되고, 세금을 통해 사회적인 나의 몫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배려'를 말하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진 낙오자의 이미지를 주는 듯싶다. 세계 경제는 상위 10권 내외임을 자랑하면서 기부문화와 관련된 수치는 70위권 진입도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은 '배려'와 '나눔'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멀게 느껴져도 괜찮은 나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단지 운전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 주위의 이웃을 한 번 더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주고 나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 성취될 '공동선'의 가치를 되새겨 볼 때, '사람이 먼저'임이 분명한 사회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의 시작은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를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우리들의 '보는 마음'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참된 복지가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해의 마지막 한 달이라도 '보는 마음'을 지니고 타인을 배려해, 서로가 서로에게 훈훈함을 나누어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그 작은 훈훈함이 누군가에게 있어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되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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