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 역사유람] 4. 6·25때 한국은행의 아찔한 현금수송작전
韓 정일권·美 맥아더 총지휘 맡아, 현금·금괴 보관하던 대전도 위기
한국은행 지점장 포함 4명 남아, 미군 협조로 화물칸 얻어 수송
북한군 포위망 뚫고 대구로 탈출, 시가전 전개하던 美딘장군 순국

▲ 우리 군역사상 최연소인 32세의 나이에 총참모총장이 된 정일권 육군 준장의 취임식이 열렸던 옛 충남도청 전경. 충청투데이DB
정일권(丁一權) 육군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동시에 육해공군 총참모총장에 임명된 것은 1950년 7월 6일. 32세의 우리 군역사상 최연소 총참모총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취임식은 임시 정부청사가 된 대전(大田)의 충남도청 회의실에서 있었다.

그리고 7월 7일 UN은 UN군사령관에 미군 사령관을 자동 임명하는 결의를 했고, 따라서 맥아더 장군이 UN사령관에 임명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전쟁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한국군의 지휘를 귀하에게 위임한다'는 공한을 맥아더 UN군사령관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소위 '전작권' 위임이다. 그러니까 '종전선언'이 되면 전작권은 UN사령관에게서 회수되는 것이며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철수'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긴박한 분위기속에 미군의 믿었던 천안전선도 무너지고 북한군의 압박이 가중되자 정부는 7월 16일 충남도청에 있던 모든 부처의 업무를 중단하고 대구로 피난할 것을 지시했다. 북쪽으로부터 포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각 부처는 급히 짐을 챙겨 대구로 떠났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 수송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서울에 있던 한국은행은 정부가 대전으로 피난오면서 보유하고 있던 현금과 금괴를 모두 한국은행 대전지점 지하실에 보관했다. 뿐만 아니라 청주, 광주 심지어 대구에 분산돼 있던 현금도 모두 대전으로 옮기도록 하여 대전지점은 현금과 금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니까 당시 정부는 대전까지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사태는 악화되기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포성은 가까워 지고 정부는 다 떠나고 없으니 그야말로 대전은 텅빈 가운데 긴장이 팽배했다. 그리고 한국은행 대전지점은 이 많은 현금과 금괴를 어떻게 대구로 안전하게 옮길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부닥쳤다. 직원은 고작 지점장을 포함 4명 밖에 없는 상황.

만약 이것을 수송하지 못해 적의 손에 들어가면 보통 큰 일이 아니어서 더욱 고민이 컸다. 직원들은 대전역을 통제하고 있는 미군 장교를 찾아 서툰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여 화물칸 하나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서대전 세이백화점 인근에 있던 한국은행 대전지점에 보관한 현금과 금괴를 화물칸에 옮기는 작전을 시작했다. 직원 하나는 대전지점을 지키고, 하나는 옮기고, 또 하나는 옮겨온 화물칸을 지키고… 그렇게 고생하며 현금을 옮기고 나니 이번에는 대구에 갈 기관차가 없었다.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북한군의 남침은 이미 금강에 까지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미군의 협력으로 대구로 떠나는 기관차에 현금과 금괴가 담긴 화물칸을 연결시키는데 성공. 마침내 적의 포위망이 좁혀 오는 대전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것이 7월 20일. 이 현금 수송차가 출발하고서 바로 대전은 미24사단 딘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시가전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대평리 방면에서 금강전선을 돌파한 북한군과 신탄진 방면에서 우회하여 진입한 북한군에 대항하는 딘장군의 공격은 처절했다.

결국 딘장군도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불타는 대전을 빠져 남으로 후퇴하다 포로로 잡히는 비극을 맞게 된다. 정말 위기의 순간, 한국은행 현금과 금괴를 적에게 넘기기 않고 대구로 안전하게 수송한 그때의 한국은행 직원들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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