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같은 국제기구가 몰려 있어 국제회의가 항상 열리는 제네바를 스위스의 수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 최대의 도시로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이 몰려 있는 취리히를 수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스위스의 수도는 인구 16만의 베른이다. 국가의 기능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을 피하고 지방 중심의 독창적 자치와 분권을 지향한 결과다. 그래서 스위스에는 수도가 26개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은 1999년 7월 '분권형 사회'를 표방하는 '지방분권 일괄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하며 '다케시마의 날'을 조례로 통과시켜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한 시마네현 의회의 행동도 이런 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앙정부에서 손을 못 대겠다고 하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일본은 지방자치제를 더욱 확대하고 효율화하기 위해 60개 광역지방단체를 6개로, 기초단체는 20개 내외를 1개 군으로 통합하는 이른바 도주제(道州制)개혁 작업을 하고 있다. 지방분권형 국가체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방자치를 외쳐 오고 선거도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중앙통제의 강화 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경찰 하나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육, 행정, 기업 등 모든 분야에서의 통제와 규제는 여전하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중앙당에서 지방정치문제까지 대추 놔라, 밤 놔라 좌우한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 물을 먹어야 큰다. 서울 물을 먹지 않으면 지방일도 중앙일도 못하는 우리의 현실. 스위스나 일본과는 정반대다. 심대평 지사가 내건 '지방분권형' 정당이란 결국 '서울 물'처럼 '지방 물'도 가치를 인정받는 정치 형태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나 일본 같은 정치 진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우리 풍토에서 심 지사의 이와 같은 구상은 정치실험이다. 실험은 성공일 수도 있고 시행착오와 실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외로운 싸움일 수도 있다. 심 지사의 정치실험이 힘을 받게 된다면 일본 구마모토 지사였던 호소카와가 자민당을 탈당, 개미군단(소수당)으로 거인을 무너뜨린 정치실험의 성공을 재현할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지금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내각제'까지도 포함한 대통령 4년 임기의 중임제 허용 등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중부권을 아우르는 지방분권형 정당이 된다면 역할을 한 층 더 높일 수 있다. 호남을 뿌리로 하고 있는 민주당과 손을 잡는 것도 그 하나다.

4·30 재보궐선거에서 '행정도시'의 중심에 있는 공주·연기에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심 지사의 신당을 내건 무소속의 정진석 후보가 당선된 것은 심 지사가 구상하는 정치실험의 관문 하나를 통과한 셈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모든 것을 전망할 수는 없지만 일단 신당의 가능성을 과시했다는 데서 평가할 만하다. 사실 지금 충청권 지역민들의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은 매우 높다. 행정수도 문제도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린 충청도의 상처 입은 자존심, 갈증, 그런 게 고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충청권'이라는 주인 없는 빈집에 서로 주인 노릇하겠다고 쪼개져 진흙탕 싸움판을 벌이면 심지사의 정치실험은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다음 대통령 선거구도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충청권'에 운명을 걸다시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격랑을 헤쳐 나갈 용기가 있어도 '시(時)'와 '세(勢)'가 따라 줘야 하는 것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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