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初唐)의 성세(盛世)를 형용하여 곧잘 당초 삼대의 치(唐初三代之 治)라고 한다. 이들 시대에는 황제가 사치를 경계하고 혁신을 잘 써서 천하가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태종 정관의 치는 후세의 거울이 되었는데 백성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갖지를 않고 도둑이 없으므로 상려(商旅)들은 안심하고 야숙(野宿)을 할 정도인 태평한 세상이었다.

태종이 군신들과 함께 정사(政事)를 논한 말을 모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에 참고로 했었다. 정관의 치가 이룩된 원인의 하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치를 태종이 경계하고 많은 현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관초 결단력이 뚜렷한 두여회(杜如晦)와 계획을 짜는데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방현령(房玄齡)의 명콤비가 좌우의 복야(僕射-大臣)을, 강직한 위징(魏徵)이 비서감장(秘書監長)을, 청렴한 왕규(王珪)가 시중(侍中)을 받아, 태종의 정치를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태종이 말했다. “현령은 짐과 함께 천하를 취하여, 백사(百死)에서 일생(一生)을 얻었다. 그래서 창업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위징(魏徵)은 나와 더불어 천하를 편안케 하고 언제나 교사(驕奢)는 부귀에서 생기고 화란(禍亂)은 방심하는 데서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수성(守成)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러나 창업의 어려움은 이제 지났다. 앞으로는 제공과 함께 삼가 수성의 곤란을 극복하도록 하자.”

창업(創業)이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업(業)을 시작(創)한다”는 것. 수성(守成)은 성업(成業)을 보수(保守)하는 뜻이다. 정관정요의 주에 ‘옛부터 업을 시작하여 이를 잃는 자는 많다’고 적혀 있다.

태종은 자기의 위채(偉采)를 신하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언제나 온안(溫顔)으로 군신에 대했으며 간하는 자를 상 주었다. 오직 만년에는 동정(東征)을 간해도 듣지 않고 점차 사치로 흘러갔다. 고종의 영휘의 치도 이른바 무위(武韋-則天武后와 韋后)의 난으로 또 현종의 개원의 치 역시 양귀비나 안록산의 난으로 기울어져 간 것이다.

창업이(創業易) 수성난(守成難)하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야 성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국전서예초대작가·서실운영·前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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