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류지봉 충북NGO센터장


지난주 1박 2일간 제주도를 다녀왔다. 세 번째 제주행이었고 삼년 만에 가는 제주길 이었다. 센터 업무와 관련 제주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첫째 날은 한국사회혁신가네트워크 창립총회를 하고, 혁신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둘째 날은 제주 4·3 다크투어를 했는데 비행기 예약 때문에 끝까지 참여하지 못하고 4·3 평화공원을 둘러보는 오전 일정에만 참여했다.

올해는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다. 해방이후 미군 점령시기 동안에 벌어진 수많은 혼란 속에서 벌어진 가장 가슴 아픈 역사다. 당시 제주도민의 10%인 2만 5000여명에서 3만명 정도가 희생됐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내걸고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4·3평화공원은 규모가 대단했지만 가슴 아픈 역사를 담은 곳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4·3기념관은 제주 4·3 항쟁의 발단 배경에서부터 참혹했던 상처와 아픔, 진상규명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배경은 해방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이전부터 일본은 제주도에 6만 5000여 병력과 각종화기를 배치해 미군과 전투에 대비했고, 제주도민들은 수탈과 군사기지 건설에 강제 동원됐다. 일본의 항복을 받기위해 미국은 제주에도 미군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폭탄을 투하하고 선박들을 격침해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해방직후부터 제주 주민들은 육지의 움직임에 발맞춰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이후 인민위원회를 발족했지만 미군정이 제주에 상륙하면서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때 제주도민을 압박하고 수탈하는 데 앞장섰던 경찰과 관리들을 기용해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희망을 꺽어 버렸다.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

4·3 평화공원을 돌아보며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중 하나가 백비(白碑)였다. 백비는 비문 없는 비석인데 아직도 제주 4·3 항쟁이 올바르게 이름 지어지지 않은 역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 까지는 제주 4·3 반란사건으로 배웠고, 대학생이 되어 선배와 학습하고 진상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4·3 항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누워있는 백비는 제주 4·3 항쟁이 아직도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명확히 규정을 한 다음에야 백비는 자기 이름을 얻고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기념관을 나오면 돌담으로 둘러 쌓인 청동조각상이 있다. 모녀상 '비설(飛雪)'이다. 군인들에게 쫓기다 젖먹이 딸을 가슴에 안은 채 희생된 변병생 모녀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상이다. 눈 쌓인 겨울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간 모녀의 삶이 추운 겨울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애처롭다. 4·3 평화공원을 둘러보면서, 해방의 기쁨과 새 사회 건설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민중들의 삶이 역사의 회오리 속 한송이 비설이었다고 생각되니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잠들지 않는 남도의 노래 가사가 입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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