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만 대전지방변호사회 제1부회장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영정(B.C.259년~B.C.210년)과 여덟 번째 황제 한무제 유철(B.C.156년~B.C.87년)은 많은 공통점과 다른점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한무제의 행동 하나하나가 진시황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시황은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하려고 서북을 시켜 불로초를 찾게 하였고, 한무제 또한 신선과 방술에 빠져 이소군과 소옹같은 도사를 가장한 사기꾼들에게 속으면서도 "어느 날 아침 내가 하늘을 나는 신선이 된다면 처자식을 잃는다 해도 무슨 상관이랴! 이는 마치 헤진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라고 하였단다. 진시황도 "내가 황제처럼 하늘을 나는 신선이 된다면 헌신 짝 버리듯 처자식을 버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니 과연 신선이 되고자하는 그들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엿볼 수 있다.

진시황은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증축하였으며, 몽염장군에게 흉노를 700리 밖으로 몰아내게 하였다. 한무제는 주전파인 이회와 주화파인 한안국의 설명을 들은 후 흉노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여러 차례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해 대규모 전쟁을 벌임으로써 흉노를 진나라 때보다 더 멀리 쫓아냈다.

진시황은 6제후국을 통일한 후 군현을 설치하여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한무제도 혹리를 기용하여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민란을 진압했으며, 수시로 이족을 침략해서 많은 사람을 학살하였다. 진시황이 아방궁과 여산에 황제묘를 축조하느라 막대한 예산을 탕진하였듯이 한무제도 방탕한 생활과 향락을 즐기느라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특히 상림원의 토목공사는 멈춘 적이 없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통하여 강압적으로 사상과 문화를 통제하였듯이 한무제도 백가를 정리하고 유가만을 존숭하여 문화전제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진나라는 수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통일을 이루었고, 만리장성, 아방궁, 묘지조성 등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국고 탕진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듯이, 한나라 역시 한무제 말기에는 국고가 텅 비게 되어 지방 곳곳에서 백성들의 반란이 소소하게 일어난 것을 보면 두 황제가 직면한 형세는 유사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진나라는 2대황제 호해에서 멸망하였지만 한나라는 무제이후 오히려 증흥의 역사를 맞이한 것은 결국 한무제의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한 전쟁중단, 경제부흥조치, 후계자선정의 혜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다.

한무제는 황태자 유거(위황후의 소생)를 폐위시키고 자살하게 한 후 황태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한무제는 온 백성에게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를 발표하고 전쟁보다는 경제정책에 전념하게 되었다.

‘자치통감’의 제자인 사마광은(1019-1086) 한무제의 죄기조에 대하여 “한무제와 진시황은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들 모두 커다란 공적을 세웠지만, 집권 후반기에 나라의 운명을 끝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한나라는 진나라처럼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진시황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반면, 한무제는 늦었지만 이를 뉘우치고 고쳤기 때문이다. 일반백성들 조차 이를 행하기 쉽지 않은데 천하를 주재하는 황제가 이를 행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가”라고 평가하였다.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보다 훌륭한 일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는 지도자나 평범한 시민이나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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