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백제의 시간은 멈춰 서있다

[최종태 교수의 백제의 미를 찾아서] 2 정림사지탑
미륵사지탑 함께 석탑 시조, 해질무렵 역광때 더욱 운치, 세계불교탑 中 조형미 일품

높이 8.33m. 백제. 7세기. 국보 9호. 부여 땅 복판에서 천오백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백제의 영화를 되새기는 듯 오늘도 외롭게 거기 서 있다. 옛날 당나라 소정방이 탑신에다가 부여를 멸했다고 쓰고 660년이라 기록했다 한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는 평제탑이라 하였다.

정림사지탑〈사진〉이라고 이름을 찾은 것은 해방되고 훨씬 시간이 지나서였다. 백제의 서울이라는 부여는 그 흔적이 물에 씻긴 듯이 깔끔하게 없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는 구나.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고 그때 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이 시가 실려 있었다. 우리 반 학생들이 부여로 수학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부소산 낙화암 밑으로 금강이 흐르고 백사장은 옛날을 말하듯 그대로 있었다. 흔적이 없는 데에 부여의 아름다움이 있다.

백제탑은 저녁 해질 무렵 역광으로 보면 더더욱 아름답다.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운치가 있다. 인공적인 데가 감추어지고 돌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어떤 고고한 인격체가 거기 서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만든 형태가 이토록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坂山河在 城春草木深)하는 당나라 둔보의 시가 생각난다. 나라는 망했는데 정림사지탑은 그때 그 바람과 함께 그 땅에 요지부동으로 서 있다. 그래서 인지 이 탑은 어쩐지 쓸쓸하게 보였다. 나만의 느낌일까. 백제의 흥망이 그 안에 다 있었다.

백제탑은 미륵사지탑과 함께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가 된다. 목탑(木塔)이었다가 돌로 모양을 달리한 최초의 탑이고 세계불교미술 탑 중에서도 가장 조형미가 높은 석조물이다. 날아갈 듯 서 있는 아름다운 균제미. 쉬지 않고 상승하는 형태의 공간미가 타에 비교 될 수 없는 격조 높은 정신의 미를 나타내고 있다

<서울대명예교수·대한민국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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