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자수간요(字雖簡要), 전환무궁(轉換無窮). 간결하고 요약 가능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말이다. 한글의 창제원리와 쓰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인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은 크게 네 가지다.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 편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한문은 우리의 문자도 아니거니와 배우고 쓰는데 어려움이 많다. 둘째는 쉽고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음성구조로 자음을 만들었고 천지의 이치인 음양오행을 담았다. 그리고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이라는 우주원리로 모음을 만들었다. 이와함께 자음과 모음의 상호관계 및 작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환하고 응용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간단하지만 유기적인 연결 가능성이 무궁하다.

크리에이터 이어령 선생도 한글이야말로 지구상 유일의 우주를 품은 글자며 생성문자라고 했다. 천지인의 우주원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한글은 에틱(etic)이 아니라 이믹(emic)이다. 모든 글자는 서로 얽혀진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동시에 그 글자들은 발음할 때의 혀 모양을 상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글은 한자와 달리 공간적 분절이라는 독특한 문자의 변별 특징으로 모든 문자를 구조화하고 있다. 예컨대 '오'자를 써 놓고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면 '어'가 되고 '우'가 되며 '아'가 된다.

한글은 지구상 최고의 디자인이다. 디터람스의 ‘디자인 십계명’ 첫 번째가 간결성인데 세종대왕은 이미 600년 전에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간결하게 만들었다. 28개의 글자, 그 간결성은 응용과 변형, 통합과 생성을 통해 무수한 글자가 만들어진다. 상형제지(象刑制之).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뜻인데 한글 창제의 디자인 요소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정인지 등 당시 학자들도 한글을 최고의 문자라고 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음양과 오행일 뿐이라는 음양오행 사상을 강조하면서 한글이 바로 천지인의 사상이 담겨 있음을 웅변했다. 학자들은 그 중심에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간결하고 자유롭고 확장성이 풍부하다는 원리를 강조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는 말을 상기시키면 한글이 얼마나 쉽고 자연성을 품고 있으며 유연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지금 새삼스럽게 한글을 이야기하는가. 세종은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다. 창제를 한 뒤 그 쓰임에 오류가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점검하고 다듬고 실험하는 등의 과정이 필요했다. 바로 초정행궁에서의 일이다. 이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동행했고 늦둥이 세자도 초정 행궁에서 함께 머물렀다. 세종은 틀림없이 초정에서 늦둥이 왕자 영응대군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쳤을 것이다. 훗날 영응대군은 '명황계감'이라는 중국 고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다.

세종대왕은 노벨상 수상에 버금가는 실적을 20여 개나 쌓았다. 그 중 한글창제가 으뜸이다.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가 온다’라는 책에서 디자인, 스토리, 조화, 공감, 놀이, 의미 등 6가지를 새로운 미래의 조건으로 뽑았다. 600년 전 세종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초정행궁에서 조선의 르네상스를 펼친 것이다. 한글의 가치를 새로운 디자인과 콘텐츠와 자원으로 특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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