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억수 충북시인협회장

지난 주말 아내와 옹기박물관, 청주어린이회관 뒤 산길, 쉼터 정자, 약수터, 산불 감시소, 미호문, 진동문, 동장대, 버스 정류장까지 걸었다. 길을 걷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튼튼한 다리와 가벼운 복장, 편안한 신발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계절은 봄이라지만, 이상 기후로 눈이 내렸다. 아직 풀리지 않은 소로에 춘설이 남아있다. 춘설에 미끄러지며 앞서가는 알싸한 바람이 코끝에 매달린다. 심호흡하며 그동안 걸었던 내 삶을 반추해 본다.

우암산은 청주의 진산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연을 벗할 수 있어 좋다. 아이들과 우암산을 걸으며 부모로서의 희망과 강요를 하지 않았다. 자녀의 희망을 묻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했다. 돌아보면 나의 삶은 문학을 하면서 기교가 들어간 노래처럼 순간의 아름다움과 멋만을 추구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나를 닮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반듯하게 개척해 대견할 뿐이다. 그동안 딸은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아들도 한 아이의 아버지로 자신의 삶을 살기에 바쁘다. 우암산은 내 아이의 꿈을 키워준 희망의 산이다. 지금도 우암산을 볼 때마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색하며 오르락내리락 시간을 걷다 보니 약수터다. 목을 축이니 발걸음도 가볍다. 산불 감시소에서 뒤를 돌아보니 청주시내와 무심천이 한눈에 보인다. 무심천은 청주 생명의 근원이며, 혈액을 공급해 주는 심장과 같다. 아내를 처음 만나 함께 걸었던 길이 무심천 길이다. 36년 전 무심천을 걸으며 아내에게 청혼했다. 옷깃이 한 번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전생에 얼마나 많은 인연을 스쳤기에 부부의 연으로 만났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에 지금까지 내가 옆에 두고 아끼고 싶은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내 생에 가장 좋은 만남은 아내다. 무심천을 걸을 때마다 아내에게 "당신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나는 당신 곁에 있겠다"라고 약속했던 말이 생각난다. 함께한 세월 생각할수록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다.

무심천의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가득한 인간의 오욕칠정과 번뇌를 버리는 것이다. 무심천 길을 걸으며 세파에 지친 절망의 마음을 내려놓고 희망과 소망을 안는 곳이다. 초심이 흔들릴 때면 무심천 길을 걸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청혼의 약속을 상기한다. 무심천 길은 서쪽 변을 따라서 장암동 장평교부터 옥산의 환경사업소 부근까지 걷기와 자전거 길이 아름답게 조성돼 있다.

왁자지껄 등산객의 소리에 상념도 잠시 서문으로 향했다. 상당산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흙으로 쌓았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돌로 쌓았다. 현재까지 개·보수하여 화강암으로 쌓은 외곽 성벽 위로 둘레길이 조성됐다. 미호문 현판이 상당산성의 역사를 말한다. 진동문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빙판이 있어 산성 안쪽 길로 걸었다. 상당산성 둘레 길을 걸으며 나를 돌아보니 옆에 아내가 있어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내와 함께 걸어 온길 그 또한 아름다운 도전이었고 후회 없는 삶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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