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위원칼럼]
강도묵 대전시 개발위원회장


다시 봄을 맞으며, 문득 유년의 봄을 떠올린다. 골똘히 잡히는 것은 없지만 마냥 즐거웠던 것은 확실하다. 산에 올라 고지배기를 뽑아오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고구마를 쏟아 붓고 엿을 고아 주셨다. 들에 나가 봄나물을 캐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얼음장이 녹은 냇가를 막아 물을 품으면 중태기가 한 사발이었다. 중태기를 잡던 추억은 너무도 생생하다. 물을 돌려 흘러가게 하고 막힌 곳의 물을 바가지로 품어내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버들가지 옆의 흙을 파서 물을 돌렸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버들강아지의 솜털 싸인 모습이 귀여웠다. 그토록 예쁠 수가 없었다. 나의 유년의 봄엔 언제나 버들강아지가 있다. 겨울방학이면 온돌방을 덥히기 위해 밥만 먹으면 뒷산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집 근처에는 붉게 사태난 산뿐이어서 먼 데까지 가야만 나무가 있었다. 한나절은 걸려야 겨우 반 짐의 나무를 지게에 얹을 수 있었다. 멀고 깊은 산에 가야 나무가 있었기에 산에 나무가 있다는 기억은 별로 없다. 그냥 나무하면 냇가의 버들강아지가 고작이었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2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봄이면 책보 대신 호미와 삽을 메고 등교하였다. 공부는 하지 않고 산에 가서 나무를 심었다. 열흘 가까이 리기다소나무와 오리나무를 심었다. 어른들과 함께 산에 나무를 심었지만, 아무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집에 오면 어른들은 감나무에 접을 붙이고 계셨다. 작년에 뿌린 고염 씨가 싹을 틔워 제법 자라 대목이 되었다. 집 주변의 짜치 땅도 먹거리 생산에 활용했다.

이게 내 유년의 봄이다.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유년의 봄이다. 고사리 손으로 매일 나무를 심기 위해 산에 올라도 그 일이 고되다고 우는 아이도 없었고, 공부는 아니 하고 산림녹화만 다닌다고 항의하는 부모님도 없었다. 어느덧 이순(耳順)이 되어 생각에 잠긴다. 전국 어디를 가나 헐벗은 민둥산은 없다. 비록 경제림은 되지 못하였다 해도 산사태가 나서 물난리를 겪어야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저 푸르른 산이 우리가 어려서 고사리 손으로 심은 나무가 자란 것이라 하니 흐뭇하다. 오늘날 우리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산에 올라 나무를 심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머니들의 거센 항의에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어린 날 나무를 심은 교육은 그 어느 교육보다도 보배로운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먼 미래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산에 나무를 심듯이 미래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은 결실을 얻게 된다는 산교육을 받은 것이다. 나무의 접도 그렇다. 고염나무에 월하를 접붙이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나와 다른 나무도 이해함으로써 같이 한 몸이 될 수 있고, 커다란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엄청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산교육이다.

오늘의 세상은 어떠한가. 모두가 눈앞의 이득에 현혹되어 올바른 시각을 갖지 못하고 조급증에 빠진 것은 아닐까. 조금은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그리운 것이 이 까닭이다. 다시 봄을 맞아, 문득 유년의 봄이 그리운 것은 단순한 봄만은 아닌 성싶다. 여유와 신뢰와 미래가 있는 봄이 내 곁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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