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포럼]
문은수 천안시복지재단 이사장


스물 한 살에 맞닥뜨린 어려움은 독배인 듯했다. 역경은 하나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밀려온다는 말을 실감했던 때였다. 생활고와 치대 학업이라는 이중고를 짊어진 내게 아르바이트는 삶의 일부였다. 그러던 차에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나는 무척 난감했다. 우리 형제에게 특히 나에게 누나는 엄마 이상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작은 냉장고라도 하나 선물하기 위해 벽돌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는 보통 3인 1조로 일했는데 제일 어린 내게는 항상 힘들고 궂은일이 주어졌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공장장의 신임을 얻기는 했으나 힘든 일을 도맡다시피 하니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하루 할당량도 가장 많았다. 그러면서도 품삯은 조원들과 같거나 덜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창 작업이었는데 하늘에 비를 채운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나는 서둘러 하던 일을 중단했다. 동료들은 계속 일하자고 채근했으나, 앞의 일로 몹시 마음이 상해 있던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작업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때였다. 서른 후반의 조원 한 명이 작업장을 벗어나려는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문형, 이번 달은 궂은 날씨가 많아 공치는 날이 많았어. 우리식구들 목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비 올 때까지만이라도 일을 조금만 더하면 안 되겠소"그의 말을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내게 벽돌공장 일은 단지 급전을 마련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면, 어떤 이에게는 간절한 호구지책이었다. 툴툴댄 것조차 사치란 생각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역시 가난한 치과대학 학생이지만 아무려면 5만원으로 한달을 사는 사람들보다 못한 삶이겠는가. 건방진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의 경험을 통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이후로 벽돌공장 일은 이전만큼 힘들지도, 같은 품삯을 받는 것도 억울하지 않았다.

나는 늘 혼자서만 힘든 새벽을 내딛으며 산다는 생각에 매 순간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마음의 시선을 아래로 바꾸자 신기하게도 위로와 긍정의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사람은 꼭 위쪽을 올려다 봐야 성공하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사소한 깨달음을 얻은 날 나는 결심했다. '훗날 돈을 많이 벌게 되더라도 가족의 생계를 염려하며 하루 돈 몇 만 원에 매달린 이들을 향한 지금의 측은지심을 결코 잊지 말자’고. 벽돌공장에서 번 돈으로 결혼을 앞둔 누나에게 작은 냉장고를 선물 해주면서 언젠가 더 큰 것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누나는 눈물로 고마움을 표시했으나, 오히려 내게 벽돌공장 일은 삶의 시각을 확장시켜준 소중한 경험이었고 선물이었다.

‘아침이 오지 않을 만큼 긴 밤은 없다.’라는 핀란드 속담이 있다. 무슨 일이든 하고자 하는 의지와 긍정적 사고로 삶을 직시하게 되면 그때그때 가졌던 목표를 꼭 이루게 되리라 믿는다. 흔히들 유리잔에 절반 정도 들어있는 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 보면 대개는 '어,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한다. 극히 일부만이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어'라며 기쁘게 말한다.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따라 상황은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결국, 이런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개인의 삶은 거대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눈높이의 변화와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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