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투데이포럼]

월평공원에 있는 월평산성은 해발 137m밖에 되지 않지만 그러나 서·북·동쪽으로 확 트였고, 그 앞에는 갑천이 길게 흐르고 있어 전략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6·25전쟁 때 딘 장군이 지휘하는 미 24사단의 34연대 지휘소(CP)를 이곳에 설치한 것도 이런 지리적 장점 때문이었다. 1950년 7월 15일 밤을 꼬박 새워가며 미 21연대, 34연대가 금강을 도하하려는 인민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이튿날, 그러니까 7월 16일 새벽 '금강방어선'은 무너졌고, 도리없이 사단장 딘 장군은 부대를 후퇴시켜 월평공원에 CP를 차리고 대전 사수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충남도청에 피란해왔던 우리 정부도 대구로 떠났고 대전 시가는 연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미군은 대전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다시 부대를 재편성했으며 7월 18일 대구에 있던 미8군 사령관 워커중장은 월평산성을 찾아와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딘 장군에게 "이틀만 더 버텨 주시오!"하고 명령했다.

그렇게만 하면 일본에서 오고 있는 미제 1기갑부대와 또 다른 지원병력 25사단이 대전전투에 투입될 것이라고 했다. 워커장군은 그렇게 지시하고 딘 장군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불행히도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워커장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투를 진두지휘한 명장이었지만, 1950년 12월, 서울 북방 전선을 시찰하던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딘 장군은 대전을 빠져 남으로 내려가다 전북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3년의 긴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월평산성에서 대전사수를 위해 악전고투하며 딘 장군이 그렇게 기다리던 기갑부대와 지원부대는 안타깝게도 때마침 동해 바다를 강타하던 태풍으로 지연되었으며 어쩔 수 없이 후퇴를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대전 사수에는 실패했지만 딘 장군이 이렇게라도 버텨줌으로써 미군과 우리 국군이 낙동강에 전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줬다고 전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월평산성에 올라 멀리 세종시와 유성 동쪽으로 전개되는 회덕, 신탄진 평야, 그리고 갑천을 내려다보면 그때의 그 치열했던 전황과 포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월평산성은 6·25전쟁 하고만 관련이 있는 게 아니다. 1995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이곳에서 세발 토기, 소위 삼족기를 발굴했는데 이것은 이 산성이 백제의 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학사들은 말한다. 사실 이들 삼족기는 백제의 땅이었던 충남지방에서 주로 발굴되는 것 역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연석과 함께 여러개의 계곡을 감싸며 쌓은 산성, 즉 포곡식산성인 원평산성은 둘레가 710m 밖에 안 되지만, 대전시 중구 대흥동에 있는 테미산성과 함께 신라와의 국경선을 지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우리 대전시민의 삶의 현장에서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史實)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또 이런 것이 훼손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다시 한번 월평산성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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