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내 어릴 적 꿈은 일편단심 기자였다. 그 시작은 단순했다. 엄마는 달리기와 글짓기를 잘하던 내게 종종 우스갯소리로 "달려서 소식 알리는 '기자'하면 되겠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꿈은 현실이 됐다.

'편집기자'라는 생소했던 일을 업으로 삼은 지 햇수로 6년. 이직도 해보고, 권태기도 있었다. 편집기자는 늘 새로운 제목, 색다른 레이아웃을 고민해야 한다. 정답이 없기에 머리가 아프고, 정답이 없기에 무한한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재밌다. 그래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내가 기자가 됐다고 하면 "이야~ 그래도 너는 꿈 이뤘네"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곤 했다. 아마 대부분 '꿈을 현실로 이룬 삶'이 아닌 '현실이 꿈을 이긴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대학간판 따라 아무 과에 들어갔다가 취직까지 흘러간 삶, 꿈을 좇았지만 취직이란 현실의 벽에 좌절한 삶, 형편 탓에 꿈이란 글자조차 사치가 돼버린 삶.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설령 꿈꾸던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건 아니란 거다. 누군가 그랬다.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땐 그저 '일'이 되는 것이라고. 아마 거의 모든 직업은 양면성이 존재하기에 그러리라. 그러다 보니 좋아했던 일이 싫어지기도 하고, 오랜 직업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기도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으레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직업이 '건물주'가 아닌 이상 생길 수밖에 없다(이해는 안 되지만 건물주도 불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보통 '우리 회사가 뭐만 좀 좋았으면'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으면'병이 엄습해온다.

봉급은 적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일을 하는 친구들은 "더 일해도 되니까 돈이나 많이 받았으면"이라고 한다. 반대로 야근, 주말 출근은 하지만 그게 다 돈으로 보상되는, 소위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돈은 반토막 나도 좋으니 시간만 많았으면"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것도 배부른 소리일지 모른다. 봉급도 적고 시간적인 여유조차도 없는 사람도 분명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겐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다.

일을 하다 보면 마일리지처럼 쌓이는 게 있다. 바로 '직업병'이다. 나 같은 경우는 '오타'와 씨름하는 직업인지라 평상시에도 오타에 민감하다. 카톡에서 오타가 나면 다시 보내고, 이야기를 할 때도 맞춤법이 틀리면 나도 모르게 지적한다. "틀리게 아니고 다르게!" "왠만해선 말고 웬만해선!" 남들이 보면 유난일지라도 어쩔 수 없다. 자동 시스템이다.

이렇듯 직업은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사니까 일하고, 일하니까 산다. 그러니 당장 때려칠게 아니라면 '아 이 일을 왜 시작했지' 해봐야 시간 낭비·감정 낭비다.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후회를 하고, 결국 자기 비하를 반복할 뿐이다. 부러운 누군가의 직업은 모르기에 부러울 뿐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지 모른다. 겪어보지 않았기에 좋아 보이는 것이고, 당해보지 않았기에 나아 보이는 것뿐이다. 그럴 바엔 그냥 만족하며 사는 게 낫다. 일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얻은 능력이 하나는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그 능력이 어디선가 ‘신의 한수’가 될지도. 우리는 오늘도 출근한다. <김윤주 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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