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심억수 충북시인협회장

불볕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습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는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선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여름은 더워야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이상기온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불볕더위 주의보가 내린 요즈음 기운도 없고 의욕도 상실한 짜증스런 날이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더위가 불쾌지수를 높이고 있다. 목에 수건 하나를 걸고 우암산으로 향했다. 너무 더워서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혼자서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땀을 흘리며 걸으니 답답하고 무기력한 나의 몸에 생기가 돌아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가끔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청주 시가지를 바라보니 빌딩 숲이 숨 막히게 빽빽하다. 멀지 않은 곳에 자연을 벗할 수 있는 우암산은 일상에 지친 청주시민에게 허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길게 해본다. 어머니 치마끈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소로를 따라 걸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삶이란 길을 따라 걷다 길을 따라 돌아오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걸어가는 길은 어느 길일까. 나는 지금껏 늘 굽이돌아 가는 길보다는 빠르게 가는 길을 선택한 것 같다. 그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날이라는 생각으로 시간에 떠밀려 그저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날들이 더 많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앞만 보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열심히 뛰었던 일상의 날들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주말과 휴일에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애·경사와 각종 모임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때도 있었다. 가장으로서 다 하지 못한 책임에 자책도 컸다. 그래도 인내하고 용기를 주는 가족들의 정감 어린 배려가 있어 위안이 됐다. 말없이 나를 응원해 준 가족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우암산을 걸으며 나를 돌아보니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이제는 길가의 쑥부쟁이만 봐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면 저리 살지 못한 내가 가여워진다.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것이 이제야 보인다. 그토록 치열한 삶의 경쟁에 나는 치열하지 못했다. 치열하지 못한 나의 삶을 위해 다그치던 아내의 현명한 조언이 잔소리로 들리더니 이제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이들도 모두 출가해 제 식구 챙기기에 바쁘다.

그동안 아집과 욕심에 사로잡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혼자만의 생각에 괴로워했다. 돌아보니 나를 방어한다는 알량한 아집의 빗장을 걸고 나만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이제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틈을 보여 주는 것이다. 틈이 없다면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 올 수 없다. 내가 먼저 마음의 빗장을 풀고 문을 연다면 많은 사람이 내 안에 들어와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린다. 불볕더위에 지친 우암산이 진한 초록 향기를 후드득 쏟아 낸다. 나도 소나기에 흠뻑 젖었지만, 무더위에 지친 마음이 진초록 향에 상큼하다. 앞으로 내 생의 종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많은 계절을 만날 것이다. 그동안 아무런 준비 없이 허겁지겁 보낸 세월을 앞으로는 잠시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고 맑은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는 여유를 가져야겠다.

어느새 해가 반짝 났다. 잠깐 비낀 소나기 덕으로 더위가 한풀 꺾인 것 같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한 불볕더위일지라도 흐르는 세월은 거스를 수는 없으리라. 나 또한 세월에 순응하면서 남은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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