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전 세종시 정무부시장
[투데이포럼]

우리나라가 1960년대 당시 서독에 광부를 7968명을 파견했는데 1979년까지 이들 가운데 65명이나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만큼 작업이 힘들고 위험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광부들의 장례식은 매우 초라했다. 이와 반대로 일본광부가 죽으면 광산 전체가 작업을 멈추고 엄숙하게 장례식을 거행했다.

충남 공주 출신으로 약관 27세에 서독 광부로 파견된 박형만 씨는 이것을 보면서 가난한 나라의 설움을 뼈아프게 느끼며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고 최근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개인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부강해져야 국민도 대우를 받는 것임을 목격했던 것.

박 씨가 서독에 파견된 것은 1964년 10월. 그는 루르지방의 엔센 광산에서 3년 동안 이를 악물고 일을 했다. 지하 1000m의 땅속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고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일도 속출했다. 그런데도 이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잘 살아야 한다'는 의지, 그것이었다.

샤워를 하기 전에는 터키 사람인지, 루마니아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온통 검둥이가 되어 땀에 젖어 있었다는 박 씨는 이 고된 작업을 마치면 곧바로 인근 마을의 돼지와 닭을 기르는 농가에 가서 일을 했다. 요즘 말로 투잡. 목적은 돈을 벌어 잘 살아보자는 것.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광부생활을 마치고 서독을 떠나야 할 1967년, 박 씨는 역시 서독에 파견돼왔던 간호사 이숙희 씨와 결혼을 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혼식도 없었고, 곧바로 떠나는 미국행 비행기에서 신혼여행을 보낸 셈이다. 마음으로 맺은 사랑이 모든 형식적 절차를 대신했다. 그리고 서독에서 그토록 고생을 한 이들은 다시 한번 더 큰 세계를 향해 도전을 한 것이다.

LA에 정착한 박 씨 부부는 독일에서 익힌 검소한 생활과 절약의 삶을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1센트 짜리 동전도 주워 모으며 열심히 살았다. 자동차 타이어 장사를 해서 돈도 벌었으며 그가 손대는 일은 모두 잘 되었다. 서독 1000m 지하에서 3년 동안 겪은 인고의 삶, 그리고 독일 생활에서 익힌 성실과 내핍 정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여기서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는 것은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번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만희복지재단'을 비롯해 한미동포재단 등을 만들어 한인사회에 봉사를 하고, LA 흑인폭동 등 우리 교포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지난 17년 동안, 그는 고향 공주에 와서 불우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들, 뇌성마비 등 장애인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해왔다. 올해도 어김없이 9월에 공주를 찾아 그가 어렸을 때 겪은 가난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아메리칸 드림을 함께 나눌 계획이다.

이와 같은 박형만 씨의 각별한 고향사랑, 그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쉽게 좌절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줄 것이다. 힘을 내라고. 눈을 세계로 돌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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