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연 공주대 겸임교수
[목요세평]

철이 바뀌나보다. 영글어가는 열매들 사이로 선들바람 살며시 다가오고, 흔들리는 나무 가지에 매달린 매미는 떠나려는 서운함을 아름다운 가락으로 대신한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접고, 지혜의 공간을 넓혀보고자 책을 펼쳤다. 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풀꽃도 꽃이다. 시작부터 처음 보는 은어가 생소했다. 웃프다(웃기고 슬프다), 머잉(무슨 소리), 글쿠나(그렇구나), 십장생(십대부터 장래를 생각한다) 등등. 그 중에서도 집단적인 따돌림인 왕따에 대한 스따(스스로 왕따 되는 것), 은따(은근히 왕따 시키는 것), 금따(금세기 최고 왕따)를 보면서 사회의 문제점들이 이들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생각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교육의 중심은 학생이다. 학생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심각한 사회의 문제점들을 숨김없이 노출시켰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학생의 재능에 상관없이 남보다 국·영·수, 특히 영어를 잘 해야 한다. 학생들의 의사와는 상반되게 서열세우기로 일등, 아니 상위그룹에 속해야 하며, 그로 인한 공부, 공부, 공부를 위한 경쟁은 과외열풍으로 이어진 현실이 그대로 묘사됐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선의의 경쟁은 학생이 해야 하는데 자식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모순된 모성애(母性愛)는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며 학원가들의 수익을 올려주기 위한 치열한 다툼으로 변질됐다. 정작 본인들은 모르는 것인지, 모른 척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경쟁 속에 자녀들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일부의 비상식적인 교육열이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계란파동이나, 갑 질과 같은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많은 가맹점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 조직에서 최고의 자리에 계신 분들의 불미스러운 언행이 최근 언론에 회자되면서 자신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우월의식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강자로서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약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잘못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큰소리로 목청을 돋운다.

우월의식은 자신과 관계가 있는 환경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출신학교와 학벌을 비교하고, 사회적 직위를 비교하고, 알고 모름을 비교하고, 있고 없음을 비교하는 등 비교의 대상은 너무나 많다. 남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 비교하여 자신을 바로 보고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남보다 우위를 점하여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려는 어리석은 우월의식은 위험하다.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상대를 무시하고 억누름으로써 자기과시를 하려는 우치한 권위주의가 문제다.

고불 맹사성의 이야기는 많으나 20대 깨우침은 큰 울림으로 다가 온다. 19세에 급제해 군수를 제수 받고 부임했을 때 어느 날 무명선사를 찾아 군수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 물었다. 선사는 착한 일을 많이 베풀라고 일러 주니, 우월감에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치라며 나가려 하자, 기왕 오셨으니 차나 한잔 하라고 권한다. 자리에 앉은 군수에게 차를 따르는데 찻잔이 넘치도록 따르니, 젊은 군수는 선사에게 찻잔이 넘치는 것도 모르느냐고 핀잔을 준다. 선사가 그대는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이 망가지는 것은 모르냐며 책망하자, 부끄러워 황급히 나가다가 문틀에 이마를 부딪친다. 그러자 선사께서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을 텐데”라고 말을 흐리자, 그 말을 듣고 크게 깨우쳐 정사를 잘 했다는 이야기는 시사(時事)하는 바가 크다. 우리 모두 상대를 무시하는 우월의식을 내려놓고 좀 더 겸손해져 남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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