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 처리'와 '과거사법 연기'를 맞바꿨다는 이른바 '빅딜설'을 놓고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빅딜설을 제기한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에 대해 5억원의 배상을 청구하는 민·형사 소송을 내겠다"는 한나라당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구태정치를 재현하려 한다든지 옳지 않은 기도를 하려 한다면 절대 용납지 않고 단호히 대처할 각오를 갖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거기엔 과연 서로 맞소송을 불사할 만한 정도의 법적인 구성요건이 충족돼 있는가. 이에 대해선 극히 회의적이다. 여야 모두 빅딜설의 실체를 부인하고 있는 탓이다. 결국 허상을 놓고서 논쟁을 벌이는 형국이 우습기만 하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아무리 정치권에 쇼맨십이 풍미한다지만 노련한 정치인일수록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어디 이번뿐인가.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이슈화에 놀랄 뿐이다. '정치 9단'이니 '고수'니 하는 수식어가 그래서 나온 듯하다.

지난 2일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안 통과 직후의 국회 본회의장을 지켜본 국민이라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것은 1년 전 같은 장소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이다. 의장석엔 물컵과 서류뭉치, 명패가 어김없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의사당엔 애국가가 울러 퍼졌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데 대한 국회의원들의 통분의 표시가 그렇게 표출됐다. 다만 다른 것은 난동자의 주인공이 지난 3월 12일 탄핵안 가결 당시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었지만 이번엔 한나라당 의원들이었다는 점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정치권의 일그러진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국회의원들이 가장 신성시해야 할 국회를 스스로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 미국 라스웰 교수의 이론을 빌리자면 대중을 하나로 결집, 열광적인 적개심을 유발하기 위해 동원하는 '선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주장만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맹신, 그래서 이를 관철시키면 '애국 투사'라는 과대망상증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원시사회에선 전투를 하기에 앞서 '광란의 춤판'을 벌인다. 그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부족의 단합을 일궈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른바 대중사회로 불리는 현대엔 보다 정교한 수단이 필요하다. 적개심을 바탕으로 대중심리를 사로잡는 고도의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 집단의 정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이 '행정도시'를 무산시키기 위해 극한적인 적대감을 유발하려 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간 행정수도를 둘러싼 국론 분열상을 보더라도 명백해진다. 아무리 감성정치가 판을 친다 하더라도 상식을 벗어난 정치 선전이 먹히는 세태는 막아야 한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의정활동은 더 이상 용인돼서는 안된다. 정치 개혁을 들먹이면서도 진정한 표심을 왜곡시키는 꼼수는 범국민적인 이익보다는 정략적인 발상에서 나오게 마련인 까닭이다.

행정도시 특별법 통과 과정에서 보았듯이 걸핏하면 국회 법사위 문을 못질해서 의안을 처리하지 못하게 막는 게 과연 정도인가. 행정도시 개념은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국가 백년대계적인 가치다. 당초 행정수도 개념이 무산된 후 여야 의원 총회에서 추인 절차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이뤄낸 정치적인 합의의 산물을 손바닥 뒤집듯 한다는 것은 법적인 안정성, 국가정책의 일관성 차원에서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한나라당 내 반대파 의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양보를 바탕으로 토론을 거치는 절차를 중시한다. 다수결이라는 원리는 합의를 이끌어 내는 유용한 수단이다. 이를 무시하는 국회라면 민주화는 백년하청일 뿐이다. 대의민주제의 절차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역주의를 촉발시키면서 밀어붙이기식 논리로 나온다면 국회 무용론을 자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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