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
박헌오 전 대전문학관장

호서문학회는 1951년 11월 전란 중에 50여명의 문인들이 모여 창립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학계에서는 문총 구국대가 조직되어 종군활동과 반공활동을 전개했는데 초대 대전지부장을 정훈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훈선생이 앞장서 대전의 문인들과 피난 차 내려왔던 문인들의 참여하에 호서문학회가 창립되었고, 그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1952년 호서문학 창간호를 발간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호서문학은 한동안 책을 내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호서문학회는 지속되어 현존하는 종합문학동인회로 국내 최장수 동인회임을 자부한다. 대전문학관이 건립되고 수많은 문학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찾아 나선 것이 ‘호서문학’ 창간호였다. 확인해본 결과 우리고장 향토사학자로 귀중한 자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집하여 향토사 자료로 제공해오고 있는 김영한 선생이 소장자료 일부를 충남대학교 도서관에 보관시킨 덩어리 속에 호서문학 창간호가 섞여 있었다.

대전문학관은 김영한 선생의 승낙을 받고 충남대학교 도서관과 협의하여 잠자고 있었던 호서문학 창간호를 빌려다가 복제 본을 만들었다. 대전문학관에서 최근 호서문학 소개전을 기획하는 동안 또 하나의 소중한 자료가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호서학보(1949년 12월12일 발행)’이다.

오래전부터 정훈선생의 자제인 정병선으로 부터 호서학보라는 소중한 책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제 누이동생이 이삿짐을 챙기다가 시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소중한 자료이니 보관하라'고 주신 책 보따리 하나가 있다고 내주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호서학보였다. 이 책의 소중함은 전공자들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나 우선 책자에 호서문학회란 광고문이 나온다. 1951년 창립총회가 있기 이전에 정훈선생을 중심으로 호서문학회가 존재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1945년 종랑도(宗郞徒)라는 단체가 창립되고 문화지인 ‘향토’가 최초로 발간된 이후 불자(佛子) 문인들이 모여 ‘백상’이란 문학지를 발간하고, 1946년 시문학지 ‘동백’이 발간된 이후 ‘현대’, ‘신성’ 등의 문학지들이 발간되었다.

호서학보에는 정훈선생이 1945년 8월 25일 계룡의숙(鷄龍義塾)이란 교사를 확보하고 학생모집 광고를 낸 것을 시작으로 1948년 호서민중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연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훈선생이 해방과 동시에 학교설립을 추진하고, 학교를 본거지로 삼아 문인들이 모여 문화운동,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훈 학장을 비롯한 지헌영, 김성수, 민병성 등 30여명의 교수진 및 교직원과 12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명단과 주소지도 명기되어 있다. 이 책에는 교육방침, 논설, 문학작품 등이 150쪽의 적지 않은 지면에 게재되어 있다.

대전의 역사들이 증거 없이 함부로 베껴져 '대전시'란 이름을 바꿔야 맞다는 집단민원을 비롯해서 수많은 수난을 겪어보았고, 중요한 역사 자료들이 사장되고, 소실되고, 반출되는 가슴 아픈 일들도 겪었다.

대전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 정성을 모으기를 소망하고, 호서문학 창간정신인 화합과 계몽의 문학 활동이 대전의 문화발전을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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