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나창호 전 부여군 부군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 고려 말의 충신 최영 장군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손녀사위로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인 고불 맹사성도 청렴한 사람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이기도 하다.

청백리는 맑고(淸), 깨끗한(白), 관리(吏)를 말한다. 그들은 공직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고, 부정하게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다. 오직 청렴한 벼슬아치였다. 관직이 매우 높은 사람도 있었고 아주 낮은 사람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곤궁하게 살지라도,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걱정하고 아픈 곳을 어루만질 줄 아는 어진 관리들이었다. 또 이들은 하나같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우국충정의 관료들이었다. 이러한 청백리들이 조선조 500여 년에 모두 218명이나 있었다. 모두가 존귀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밝게 하는 빛이었고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었다. 60여 년을 관직에 있었고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과 백비로 유명한 박수량에 관한 이야기를 해본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의 거처를 찾은 세종대왕은 크게 탄식했다. 집채의 서까래가 시커멓게 썩고 성한 기와가 없어 곧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바닥에는 보료는커녕 거적이 깔려 있었다. 세종은 궁에 돌아가서도 마음이 아프고 안쓰러워 신하들과 도와줄 방법을 의논했다. 이에 신하들이 "황희 정승은 청렴하여 나라 돈으로 내리는 물품은 받지 않을 것이니, 우리들이 성의를 모아 돕겠다"면서, 어느 날 하루 동안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를 거둬 황희 정승 집으로 보내자고 했다. 세종은 묘안이라고 하면서 내일 당장 시행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물건을 팔러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성문을 닫을 시간이 돼서야 계란 몇 꾸러미를 든 계란장사가 들어왔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씁쓸했지만, 그거라도 황희 정승 집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황희 정승 집에 심부름을 다녀온 사람으로부터 "계란이 상해서 먹지 못하고 모두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청빈함은 인력으로 말릴 수 없는 모양"이라고 세종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전라남도 장성 땅에 박수량의 묘가 있는데, 그의 묘비에는 아무런 공적도 새겨져 있지 않다. 백비를 세운 연유는 "비에다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박수량의 청렴함을 해칠 수 있으니 차라리 그냥 세우라"고 임금이 명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청렴결백했으면 글로 공적을 새기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된다고 했을까, 미뤄 짐작해볼 일이다.

영명한 지도자와 훌륭한 청백리 충신들이 많았을 때 나라가 흥성했고, 우매한 지도자와 탐관오리 간신들이 설쳤을 때 나라가 쇠했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가난이 비록 자랑거리는 아니나, 결코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공직자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청빈(淸貧)도 좋지만 청부(淸富)도 탓할 일이 아니다.

행여 부패한 공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부패한 공직자는 나라와 사회를 병들게 한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위를 이용해 재물에 눈독을 들여서도 안 될 일이다. 필자가 공직자들이 부패했다는 전제하에 이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공무원 비리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 공직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공직사회를 욕 먹인다. 나라와 지역 발전과 주민복지 향상을 위해서도 공직사회는 맑고, 공직자는 청렴해야 한다. 청백리 정신을 이어받아 윗물이나 아랫물이나 모두 맑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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