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포럼]
박재필 청주 청북교회 목사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의 줄임말인데, 사실 준수한 단어로서의 가치를 가진 말도 아니고 자주 사용하기에는 부끄러운 속어 또는 은어 수준의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격이 떨어지는 말이 정치면과 신문 사설의 제목으로까지 부상할 만큼 사용되고 있을까. 실제 생활에서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윤리학을 연구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주지'(主旨, motif)를 통한 연구라는 것이 있다. '주지'란 ‘근본이 되는 취지’라는 말인데, 영어에서는 ‘지배적인 아이디어나 특징(a dominant idea or feature)’라고 한다. 즉 주지는 어떤 행위를 하는 데 근본이 되는 취지나 길잡이 또는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두 가지 주지를 다룬다. 하나는 '목적론적 주지'이고, 다른 하나는 '의무론적 주지'이다. 목적론적 주지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데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선을 목적으로 하고, 인간의 모든 행위들도 어떤 선을 목적으로 한다고 가르친다. 의무론적 주지는 임마누엘 칸트로 대표되며, ‘의무나 규칙, 원칙을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는 강제된 법 중심의 사고보다는 '목적론적 주지'에 입각한 사고가 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쓰는 말들 중에 "좋은 게 좋은 거다", "꿩 잡는 게 매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잘 끝났으면 됐다" 등이 그런 정서를 표현한 말들이다. 선한 결과만 내면 됐지 그 과정의 적법성을 복잡하게 따지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정서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다소 편법적이거나 불법적인 요소가 있어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용납하거나 눈감아 주어도 괜찮다고 묵인한다. '법대로 하자'는 것은 정이 없고, 갈등을 풀 마음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정서가 '내로남불'이란 부끄러운 말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철저하게 법을 지키면서 사는 정신도 꼭 필요하고, 조금 융통성을 부리면서 사는 것도 때론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한 도의적 선을 넘을 때는 사회가 그것에 대해 경종을 울릴 가치관 형성이 필요하다.

새 정부가 빨리 조각을 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인물을 선보이고 있지만 정책수행 능력을 평가 받기도 전에 도덕적 흠결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들이댈 수 있는 기본적 잣대는 법적인 기준이다. 법에 명시된 대로 하면 된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 그리고 정서적인 기준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당은 자기들이 야당생활 할 때 제시했던 검증의 기준을 갖고 방향을 잡아야 한다. 야당은 불과 몇 달 전까지 여당하면서 겪었던 고충을 이해하면서 이번 기회에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기회로 삼으려고 하면서 대승적 차원에서 도와줘야 한다. 예수는 그냥 하늘에서만 통치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이었다. 이 역지사지의 모범에 대해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뱅(J. Calvin)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하시기 위해서 직접 오셨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까. 서로의 양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불륜이 없어야 남의 불륜을 질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질타할 자격을 얻자고 깨끗하자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위해서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내로남불이란 구차한 문제가 없어지고 이 난맥이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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