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 서예이야기]

전한말(前漢末),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 일컬었다. 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생각했던 만큼 순탄치 못했다.

복잡한 제도에 얽매어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략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 정체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자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 신사에서 왕광과 왕봉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데 이 두 사람은 관군에게 쫓기고 도망 다니던 마부, 왕상, 성단 등을 끌어들여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무리를 이루어 도적질을 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해 가곤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여 명들은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자주의 창고와 관아의 창고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힘 있는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모여들게 되었고 급기야 이 녹림지방은 5만을 헤아리는 대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군대를 일으키자 왕광은 그들과 합세하여 왕망이 다스렸던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 때문에 녹림호객(綠林豪客)이라 했다.

수호지(水湖志)도 녹림호객의 이야기다. 그리하여 (동은 동, 서는 서)도 아니다. 로빈후드의 근거지도 샤우드의 숲이 아니였던가. 하여튼 지배(支配)에 고생하는 민중에게는 녹색이 깊은 산중이 어지러운 시대에 사는 백성들에게 꿈을 안겨다 주었다 한다.

지금은 법의 나라로 악법도 법이라 했듯이 현실에 맞지 않는 다고 자기의 무력 주장을 한다면 나라의 위태로움은 머지않아 파멸의 길을 걸게 되어 국가의 발전이 어려워지므로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국민이 원하는 국가의 방법으로 이어가야 민주국가로서 후대에 더욱 빛난다. 우리 생활방식 속에 알맞은 터전인지 항시 남을 위해 국가와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위해 바른 판단 속에 더욱 매진해 보자.

<국전서예초대작가·청곡서실운영, 前대전둔산초교장 박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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