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낱말 속 사연]

십년감수(十年減壽). 글자대로 풀이하면 수명이 십 년이나 짧아졌다는 뜻이지만 몹시 놀라거나 위태로운 일을 겪었을 때 쓴다. "십년감수했지 뭐야! 어젯밤에 음주운전으로 역주행하는 차와 충돌을 가까스로 피했으니 말이야." 여기서 주목할 만한 말은 왜 하필 수명이 짧아져도 10년 인가이다. 20년이면 어떻고 30년이면 어떠한가. 축음기가 처음 도입돼 시험가동을 할 때 고종 황제의 놀라움의 표현 한 마디에 그 사연이 담겨있다.

1897년 미국 공사이자 의사인 앨런이 우리나라로 들여온 축음기가 어전에 설치됐다. 고종과 대신들 앞에서 당시 명창이던 박춘재가 선발돼 처음 원통식 축음기에 판소리를 시험 녹음했다. 커다랗게 길게 튀어나온 나팔에 입을 대고 말이다. 녹음이 끝난 뒤 원통식 나팔 통에서 박춘재의 판소리가 흘러나오자 고종은 물론 대신들은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생명이 없는 기계에서 사람 목소리와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때 고종은 놀라움에 한 마디 했다. "춘재야, 네 수(壽)명이 십년(十年)은 감(感)했구나." 한때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사진 촬영하면 영혼을 빼앗겼다고 하듯 박춘재 영혼도 축음기에 빼앗겨 앞으로 수명이 크게 단축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십년감수'란 말이 탄생했다. 초기에는 대신들 사이에서 유행하다 궁궐 밖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세상살이가 어찌 보면 십년감수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놀라거나 위태로운 일이 쉴 새 없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각종 사건사고의 노출로 인한 개인적 위태로움은 물론 북 핵과 미사일 도발, 사드 발 충격, 영토분쟁 등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가 상존하지 않는가. 정치 갈등 또한 위태롭다. 마치 깨질 우려가 있는 살얼음판 위를 걷지만 빠지지 않고 저수지를 건너는 것과 같다. 분명 십년감수다. 우리는 언제 십년이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 사라져 제 수명을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