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관 청주의료원장
[목요세평]

봄과 가을이 이젠 없어졌다고까지 말하지만 요즈음 이른 새벽 산책길에서는 계절이 주는 행복감에 자주 빠져든다. 날씨가 주는 상쾌함, 이웃집 담장 넘어 풍겨오는 라일락 향기, 길가 여기저기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꽃 잔디가 내뿜는 짙은 향기 때문이다.

조금 부지런히 걸을라치면 자연스레 따르는 가쁜 숨과 함께 살포시 느껴지는 발한이 건강하다는 의미로 다가와 이 역시 행복감의 요소가 된다. 한 낮 따사로운 햇빛 속 온통 연두색으로 뒤덮인 자연의 색깔은 설렘을 갖게까지 한다. 산을 좋아하는 어떤 이가 '산에 오르면 계절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데 봄에 산에 오르면 대자연이 곰실곰실, 꿈틀꿈틀하며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고 쓴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난 주말 간호부 관리자들과 함께 변산반도 채석강에 다녀왔다. 억 년의 세월 속에 바닷물에 침식되며 퇴적된 절벽이 이루는 장관은 강과는 관계없는 그곳이 왜 채석강인지를 알기에 충분했다. 좋은 날씨 속에 찾은 주변 산사에서는 억 년 전 풍광과는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묻혀 서로 나누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꽃이 져버린 동백나무 군락지에서 그 꽃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하고, 꽃과 잎이 피는 시차로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상사화 이야기, 이팝나무 조팝나무가 가난하던 시절 쌀밥을 연상하며 선조들이 위로받았다는 이야기에는 다소의 웃음도 있었으나 그 꽃들이 필 때면 친정에 갈 엄두조차 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에서는 보릿고개에 대한 생각과 함께 조금은 짠해지는 분위기, 그 분위기를 바꾸고자 애기 똥 풀이 왜 그렇게 불리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이런 이야기 속에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하나 열리고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되며 '함께'의 분위기로 모아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 우리는 병원에서 작은 세미나를 했다. 지역사회에 더 스며들어 지역의 건강 수준을 높이기 위해, 또 의료원을 찾는 모든 분들이 내 집같이 느끼는 공공의료기관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더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발제자의 준비와 발표도 좋았고,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해 보자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도 좋았다. 그러고 나서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자연에 빠져 서로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 보자는 의도로 나들이를 계획했던 것이다.

도로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융통성 있는 여행 코스, 준비된 다과, 여행지 시간 배정, 식당 결정, 운전기사에 대한 배려, 금년에 기관으로부터 상을 받은 분들이 쏜다(?)는 커피에 대한 계획까지 세심한 고려와 실행이 마음에 들어 흐뭇했다. 말없이 서둘러 앞서 가 입장권을 사고, 시키지 않았어도 사진사가 되어 멋있는 사진에 제목까지 붙여 바로 휴대폰으로 보내 주는 바람에 '작가'라는 호칭을 받기도 하고, 눈에 띌 듯 말 듯 또래와 선후배 사이에 만들어지는 위계를 넘는 정겨움, 식사를 하며 주전부리를 나누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와 웃음소리들이 어우러져 하나로 이겨지는 것을 느꼈다.

내소사 마당에 거의 90도로 휘어진 소나무 앞에 직원이 서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사람들이 계속 그 곳을 차지하기 때문에 기다린다고 했다. 수년전에 왔을 때 거기서 찍은 사진이 너무 좋아서 다시 찍겠다는 말을 들으며 누구에게나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또 찾게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 우리들이 실행하려는 것 역시 환자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새로운 용기로 꿈틀거리는 이 봄 우리들의 다짐이 지역사회에 크게 기여하는 청주의료원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나들이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