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부분

이름 부르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대학 강의에서도 전자출석 시스템이 도입되어 학생 스마트폰에 앱을 깔면 자동으로 출결상황이 체크된다. 예전처럼 수강생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치곤 하던 정경은 사라져간다. 은행이나 병원, A/S센터에서는 물론 청취자 참여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번호가 자연스럽게 통용된다. 홍길동이 아니라 1234번, 8282번님이 된지 오래인데 전화번호나 자동차 번호 또는 번호표에 적힌 숫자가 어느 사이 나를 대신하여 분주하게 움직인다.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이름 대신 번호사용이 급격히 늘었을까, 자신을 감추고 싶은 인간의 익명본능 때문일까 아니면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 관리하기 쉬운 숫자를 사용하여 대중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1952년 발표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 이즈음 다시 생각난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몸짓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내게로 와서 의미를 피워내는 꽃이 되었다는 절창. 발표 이후 부여된 수많은 해석과 의미를 잠시 거두고 글자 그대로 나지막이 읽어본다. 어느 카페에서는 음료가 나올 때 고객의 이름을 부른다<사진>. "4989번님!" 대신에 "성춘향님!" 하고 부르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흐뭇해진다. 이름을 불리기가 꺼려진다면 별명도 좋겠다. "너구리님, 산딸기님….", 건조하고 삭막해서 섬뜩하기까지 한 숫자호출 보다 그 얼마나 따뜻한 정경일까.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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