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규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기반표준본부장
[시론]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숫자를 말해보라 하면 많은 이들이 3아니면 7이란 숫자로 대답할 것이다. 3은 동양에서 복(福)을 상징하는 숫자이고, 7은 서양에서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다. 동양철학에서 양을 상징하는 1과 음을 상징하는 2가 합쳐진 3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존재를 의미하며, 서양철학에서 하늘을 상징하는 3과 지상을 상징하는 4가 합쳐진 7은 완전수로 인식됐다 한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래나 철학의 의미는 잘 모르더라도, 왠지 3이나 7이라는 숫자를 대할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3과 7은 표준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측정기구나 제도를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인 도량형(度量衡)의 세 글자는 각각 길이, 부피, 무게를 나타낸다. 19세기의 서양 과학을 보더라도 길이, 질량, 시간이라는 3개의 기본 단위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3개로 시작한 단위계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는 전류, 온도, 광도, 물질량 4개의 단위가 더해져 총 7개의 기본 단위로 구성돼 있다. 국제단위계가 완전한 숫자를 상징하는 3으로 시작돼 7로 완성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단위계를 구성하는 단위의 수 뿐 아니라, 각 단위를 정의하는 데도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길이 1 m는 빛이 진공 중에서 1/299 792 458 초 동안 진행한 길이로 정의된다. 여기서 299 792 458이라는 숫자는 빛의 속력을 나타낸다. 길이 뿐 아니라 질량을 제외한 다른 단위를 정의하는 데도 특정한 숫자가 사용된다. 시간의 표준에는 세슘-133 원자의 주파수에 해당하는 숫자(9 192 631 770)가 사용되며, 온도의 표준에는 물의 삼중점 온도와 관련된 숫자(273.16)가 사용된다. 합금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을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는 질량의 정의에만 특정 숫자가 사용되지 않는다.

길이의 정의에 사용되는 숫자인 빛의 속력은 잘 알려진 물리상수다. 물리상수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양이나 물리학의 이론방정식에 포함되는 양들 중에서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숫자이다. 이와 같이 변하지 않는 숫자인 물리상수를 이용해 단위를 정의하면 변하지 않는 기준이 돼야 하는 표준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다. 현재는 길이와 시간의 정의만이 물리상수를 이용해 정의돼 있다. 그러나 2018년에는 다른 단위들도 물리상수를 이용해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예를 들어 질량의 정의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의 이름을 딴 ‘플랑크상수’를 이용해 새롭게 정의된다. 질량의 정의가 바뀔 경우 현재 유일하게 인공물로 구현되고 있는 질량의 표준도 변하지 않게 바뀔 것이다.

표준은 현재의 과학기술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질량의 정의가 인공물이었던 이유도 인공물을 이용하는 방법보다 더 정확하게 질량을 구현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수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질량의 표준이 바뀐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발전해 물리법칙을 통해 질량을 구현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선진국의 표준연구기관들은 수십 년 전부터 질량의 재정의(再定義, redefinition)를 위한 연구를 추진해 왔고, 이제 플랑크 상수의 마지막 끝자리 두 숫자(6.626 070 040 XX × 10의 -34승 마지막 XX)를 정하는 단계에 와있다. 수십년을 투자한 결실을 이제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6년째 관련 연구에 투자를 하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빨리빨리를 외치는 국내의 현실에 비하면 그나마 장기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이지만, 표준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다. 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연구에 대해서는 국가나 수행기관이 투자는 하되 기다려 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모든 과학기술 연구, 산업 생산, 일반 상거래 등 인류의 활동은 측정을 동반하고 있으며, 정확한 측정은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하다. 물리상수라는 숫자들을 이용해 새롭게 정의되는 표준은 세상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도 세상의 기준을 만드는 숫자 연구에 보다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다려 줄 수 있는 인내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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