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리학당 오원재 원장
[이상엽의 역학이야기]

신도안은 제왕의 터, 자미원국이다. 산태극과 수태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명당이다. 도읍지로 손색이 없는 길지 중에 길지다. 십승지 중에 한곳으로 삼재가 들지 않는 명당이다. 조선 최고의 도승(道僧)으로 추앙받는 무학대사의 천도(遷都) 주장 이후 구전되는 말들이다. 그런데 왜 아직 도읍이 되지 못했을까, 도읍이 되기는 하는 걸까? 500년이 훌쩍 지난 기약 없는 구전이지만, 은연중에 그 말이 실현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직도 제법 많다.

현 계룡산은 삼한시대는 천태산(天台山), 고려 시대는 옹산(翁山)으로 불렸으나, 무학대사께서 금계포란형과 비룡승천형이 혼재됐다고 계룡산이라고 부른 뒤 바뀐 명칭이다. 이 산 남쪽인 신도안은 과연 자미원국 일까, 용·혈·사·수는 자미원국의 조건을 갖춘 걸까?

명당 자미원국은 밤하늘에 나타나는 자미원의 모습과 그 지형·지세가 같다고 해 붙여진 명칭이다. 북극성을 중심에 둔 자미원의 북쪽에는 현무 같은 별, 남쪽에는 주작 같은 별, 왼쪽에는 청룡 같은 별, 오른 쪽에는 백호 같은 별이 둘러싸고 있어 물샐 뜸조차 없다. 허한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신도안의 산은 건방(乾方)에서 내려왔는데, 아홉 번 굽이쳐 나가야 명당을 만든다고 하는 물은 산의 정면[巽方]으로 빠져나가고, 단정해야 할 앞산[案山]은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해 생기가 머물지 못하고 흩어진다.

또 좌청룡 우백호는 거의 같은 높이로 쭉 뻗었으나 제갈 길을 가고, 평지는 이루었으나 물이 곧게 빠지고 안산이 부실해 생기를 머금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계룡산 천황봉의 창·칼과 같이 날카롭게 생긴 검은 바위는 위협적인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쌀개봉, 머리봉 등의 검은 바위에서 나오는 살기는 혈 자리를 뒤덮고도 남는다. 신도안의 산세·수세에서 자미원을 닮은 모습은 물론 명당이 갖추어야할 기본 조건도 찾아보기 어렵다. 자미원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산세이다.

이를 본 조선 하륜(河崙)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간다." 이런 땅에 도읍을 건설하면 얼마 되지 못해 패망한다고 한 호신순 법을 인용해 조선 천도(遷都)를 반대했고, 그 주장은 받아들여져 대궐 공사는 중단됐다. 500년 내내 살기를 감당할 수 있는 종교인들이 거주했고, 이후 군부대가 들어온 걸 통해 신도안은 자미원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아직 신도안을 자미원국으로 믿는 풍수학자가 많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산세와 수세에 따라 명당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건 초보자도 다 안다. 백두대간이 육십령고개를 지난 영취산에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팔공산, 마이산,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이 형성되었고, 전북 장수군 수분리에서 발원한 물은 용담호를 지나 계룡산 뒤를 감돌지만 그 수량이 부족하고 내당수도 시냇물 같다. 그래서 산세와 수세는 대궐 터가 될 수 있는 기본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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