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행정가' 새지평 활짝

주인장의 갑갑한 속을 미뤄 짐작이나 하듯 칼바람이 창문에 부대끼며 갈 곳을 못 찾아 비명을 지른다.
뇌경색에 이은 두 차례의 고관절 골절로 요즘 그의 생활은 '잠시멈춤' 상태다.
맨손으로 시작해 행정가의 CEO시대를 개척하기까지 일평생 일에 묻혀 살아 온 사람에게 바깥 출입이 여의치 않으니 그 속내 얼마나 숨막힐지 짐작코도 남는다.
그래도 꽃피는 춘삼월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어 내리라 마음을 추스려본다.
모진 풍파를 견디며 '인간승리'를 일궈낸 장본인답게 주병덕(朱炳德·67) 전 충북도지사는 병환에도 일말의 흔들림 없어 보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 주먹에 믿을 만한 것은 명석한 두뇌, 그러나 가장 큰 밑천은 스스로 되돌아 봄에 부끄럼 없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이었다.

1936년 충북의 평범한 농가에서 난 그에게는 전설 같은 태생의 비밀이 있다.

"바로 난 아이에게 이가 솟아 있었답니다. 이런 아이들은 십중팔구 장사로 살아가게 되고 결국 나라에 해를 끼치는 역적이 된다고들 믿었답니다. 마을이 발칵 뒤집혀 저를 해하려 했다는군요."

태생부터 범상치 않았던 그는 남다른 총명함으로 다시 한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동네 제일의 수재는 어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명문 청주중학교를 거쳐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자취를 했어요. 농사꾼 집안 형편이래야 뻔한 것 아닙니까. 배 곯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으니까요."

공부 하나만은 자신 있는 그였지만 장대하고 요란한 꿈은 키우지 않았다.

그리고 엉뚱한 선택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을 일으킨다.

4·19 직후 서울대 농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간부 후보도 아닌 순경시험에 응시한다.

"자유당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를 부렸던 경찰의 사기가 민주 의거로 땅에 떨어졌을 때였습니다. 엘리트를 뽑아 경찰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명목으로 대학생들을 현혹시키더군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월급 7만원 지급의 소문을 풀풀 내면서 말이죠."

사탕발림에 속은 그는 제26기 순경으로 경찰계에 투신했다.

정부에 속아넘어간 학사경찰과 대학생 출신 예비 순경들이 데모를 불사했지만 선수친 학사경찰들만 경사로 출발했을 뿐 순경 간판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오발탄은 얼마지 않아 초고속 승진을 발판 삼아 직격탄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순경부터 총경까지 시험에 의한 진급을 독차지하는데 소요된 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없던 일이고 앞으로도 꿈꾸지 못할 대기록이자 그의 손에 의해 경신된 기록의 서곡일 뿐이었다.

30대 초반 경찰서장은 실력으로 무성한 갈등과 시기를 잠재웠다.

강원도 횡성 서장을 시작으로 대전서부, 서울 서부서장을 거쳐 1978년에는 치안본부 기획과장으로 들어섰다.

서울 서부서장 시절에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경찰내부 뒷돈거래는 공공연한 공식에 의해 형성됐습니다. 교통은 200만원, 경감 승진은 100만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한번은 측근이 와서 남들 다 받는 돈인데 왜 마다해 사서 고생하냐고 혀를 차더군요."

말 많고 탈 많던 업계에서 강직과 청념은 그 만의 통솔 비법이었다.

1983년부터 4년간 충남도경찰국장(현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면서도 타고 난 품성은 변하지 않았다. 1988년 경찰대학장 시절에는 경찰대학에 여자들이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금녀의 벽을 허물었다.

"경찰계의 혁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가 오겠냐는 비웃음만 쏟아집니다. 사건이 다양해지며 고급 여성 경찰인력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훗날 지사시절 공군사관학교도 여학생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게 단초를 제공한 이도 그일 만큼 여성에 대한 배려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은 특별했다.

경찰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앞날을 도모하던 그는 1990년 관선지사로 고향 충북의 수장이 된다.

그러나 그 해 9월 단양지방에 사상 초유의 수해가 발생했고 일종의 양심선언으로 인재를 인정한 그에게 괘씸죄가 적용돼 6개월 만에 조기 퇴진한다.

그의 정계진출은 '와신상담'에서 촉발됐다.

YS계 민주산악회와 연을 맺던 그에게 중상모략을 일삼던 적들이 있었고, 믿었던 YS는 공천을 주지 않았다.

결국 JP호에 승선한 그는 1995년 민선1기 충북지사 당선으로 명실공히 금의환향했다.

힘있는 충북 건설을 기치로 준비된 지사는 CEO행정가의 새 지평을 열어간다.

중앙정부를 상대로 막무가내 떼를 쓰며 예산을 확보하고 든든한 돈줄을 밑천 삼아 기발한 사업에 착수했다.

오송의료단지, 오창산업단지, 청주국제공항은 그의 개발품, 특히 지금까지 벤치마킹 문의가 쇄도하는 생명의 숲 가꾸기 사업은 그가 자랑하는 최고의 작품이다.

"1992년 스위스 방문에서 착안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청풍명월 우리 고장에서는 청정 자연을 가꾸고 보전하는 것이 최고의 사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스위스와 독일 같은 나라에서 비법을 물어오니 그 만하면 성공작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숲 가꾸기는 현재 산림청에서 주도해 전국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충남 공주에서 가져간 도두(작두콩)씨를 진천에서 집단 재배해 수출작목으로 키운 것이나 선인장을 농가에 보급하고 관상어를 고소득 품목으로 한 단계 올려놓았듯 수익사업에 대한 그의 발상과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도민을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은 그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특히 IMF 외환위기로 규모가 축소된 청주공항은 "이득 없이 소음만 유발한다"는 반발을 사며 곤욕을 치르게 했다.

제아무리 풍파가 몰아쳐도 신념을 꺾는 법은 없었다고 한다.

1998년 지방선거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낙마의 고배를 안겨줬다.

서운할 법도 하련만 그것이 민심이었다면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에사 그는 부인 김종군(60·세종대 교수·김치박사) 여사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는다.

아들 형제와 외동딸을 유학시키고, 시집 장가보내고, 묵묵히 뒷바라지 한 반려자가 더 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정치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어라 일만 했어도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한 보람에 후회는 없습니다. 새 봄이 오면 나들이를 하고 싶어요. 따스한 햇볕을 벗삼아 건강을 되찾는데 공을 들일 생각입니다."

춘삼월, 용트림하는 세상 속에서 그의 건재한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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