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문화카페]

▲ 사진=이규식
경부선 ITX-새마을 하행열차. 영등포역에서 승차하니 옆 좌석에 머리가 하얀 중년남자가 앉아있다. 수원-평택-천안-조치원-대전 등 중간 정차역마다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즉시 이 승객은 벌떡 일어서서 어디론지 가버린다. 살펴보니 입구 쪽 통로에 서있다. 그제서야 입석 승객임을 알았다. 빈자리라면 그냥 앉아 있다가 자리 임자가 나타나면 미안하다면서 비워주면 되련만 이 승객은 어김없이 열차 정차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우연찮게도 좌석을 예약한 사람은 내가 먼저 내릴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시치미를 떼고 그냥 있었다면 목적지까지 앉아갔으리라. 인터넷으로 열차표를 구입할 때 옆자리는 분명히 이미 팔렸는데 무슨 일이 있어 열차를 타지 못했고 취소도 하지 못한 듯하였다.

입석으로 표를 사서 빈자리에 앉아있으면 도무지 불안하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자리임자 존재 때문이기도 하고 남의 좌석에 앉아있다는 불편함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그냥 앉아 있다가 좌석 주인이 등장하면 비켜주는 것이 관례인데 이 승객은 특이했다. 혹시 강박증이나 결벽증, 정서불안 같은 심리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 시간 반가량 동석하면서 그런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할 때 보니 눈빛이 무척 맑았다.

이즈음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인사들이 한결 같이 모른다, 아니다, 기억에 없다 또는 뻔한 사실을 거짓으로 증언하는 모양새를 보니 이런 양심적인 사람들의 태도가 소중해보였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인물들이 그때만 모면하고 보자는 도덕불감증이 만연한 이즈음 결국 세상을 지켜가고 혼탁한 사회를 유지하고 정화시키는 힘은 이런 원칙주의자 어찌 보면 시치미를 못 떼는 융통성 없는 사람들의 정직함에서 솟아나오는 듯하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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