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로]

▶하야(下野)는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이니 관직에서 물러남을 말한다. 탄핵(彈劾)은 '남의 죄상을 캐어 밝힌다'는 뜻이지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표적물을 쏘아(彈) 잘라낸다(劾)'는 의미다. 쉽게 얘기해서 하야는 스스로 내려오는 것이고 탄핵은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것이다. 야권이 주장하는 '질서 있는 퇴진(退陣)'이 가장 바람직한데 사실은 이 또한 '질서'가 없다. 대권 욕심을 내는 쪽에서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왜곡된 질서인 셈이다. 하야를 하면 2개월 안에 대선을 치러야하니 시간이 없고, 탄핵을 하면 시간만 끌다가 임기를 거의 채우게 되니 이도저도 아니다.

▶박대통령이 세 번째 사과(300초)를 했다. 1차 때 사과는 100초, 2차 때 사과는 560초였다. 1·2차 때 담화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니, 잘못했다고 치자. 그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야?'라고 말했다면 이번엔 '내가 잘못했다. 아니, 잘못했다고 치자. 그러니 국회서 물러날지, 말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임기단축 퇴진론'은 포석(布石)이다.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하야는 법정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탄핵은 망명할 수도 있는 곁길이다. 그렇다면 '퇴진'은 결국 '질서'를 무시하고 퇴로를 연 것이나 다름없다.

▶탄핵의 주체는 정당이고, 하야의 주체는 국민이다. 그래서 탄핵보다는 하야가 민심에 더 가깝다. 대통령이 '조건부 퇴진'을 거론한 것은 엄밀하게 보면 무지가 아니라 무시다. 국민은 지쳐있다. 피로도가 극에 달한다. 이제 TV에서 '게이트' 협잡꾼들이 나오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용서의 유효기간도 끝났다. 용서도, 용서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용서할 마음이 사라졌는데 용서를 구하면 오히려 노여움이 커진다. 용서할 시간을 주었음에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간 것 자체가 '제2의 국정농단'이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단지 감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버틴 것과, 용서를 구하면서도 진정성이 없었다는데 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번 게이트가 대통령과 국정농단세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반적인 국가시스템의 붕괴라는 게 더 두렵다. 국정을 농단하는데도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걸러내지 못했으며, 아무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게 두렵다. 시스템을 바로잡지 않고는 차기, 차차기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시위의 촛불은 국민의 감정선을 오롯이 담고 있다. 종이컵 안에는 분노로만 채워진 게 아니라 희망도 함께 담겼다. 주권 도둑들이 결코 발붙일 수 없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절제된 분노가 필요하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