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 속았기 때문에 잘못 뽑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안 속겠다며 잘난 척을 했지만 속았다. 등신처럼 뽑았고, 등신처럼 당했으며, 등신처럼 후회하고 있다. 더 기가 찬 것은 대통령에게 속은 것도 억울한데 일개 '몸종'에게도 속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대통령을 잘못 뽑은 것이나 '몸종'에게 속은 것이나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와 있다. 대통령은 버티지 말고 진실을 말해야한다. 그 방법이 설령 하야(下野)든, 퇴진이든, 탄핵이든 간에 농간(弄奸)에 휘둘린 어리석음을 고해야 옳다. 그래야 국정을 농단한 자들을 처절하게 단죄할 수 있다. 비싼 세금내면서 '헐값' 신세로 살아온 국민들은 너무 억울해서 잠도 안 온다. 부끄러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에게는 연민조차 생기지 않으니….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숨졌다. 정부는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숨졌다'고 발표했다. 6월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22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은 분노를 상승시키는 촉매재가 됐다. '데모'라며 눈총 받던 대학 시위는 '시민' 시위로 번졌다. 당시 여당(민정당)의 대표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하는 6·29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수십 년간 이어진 군부독재가 백기 투항한 것이다. 당시 정치 한복판에는 막강한 권위와 대표성을 지닌 '3김(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이 있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들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를 뽑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대선결과는 ‘軍部’ 노태우의 승리였다. 원인은 단 하나. 야권 분열(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이었다. 피를 바쳐 얻은 '승리'가 늙은 탐욕들 때문에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87년 체제'가 성립된 지 30년이 되는 지금도, 똑같은 일이 재생되고 있는 듯하다. 헌법을 훼손한 대통령, 시위 물결,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정치판이 판박이다. 대통령이 권능을 상실하자, 모두들 대통령이 돼보겠다고 날뛰고 있는 것이다. 막강한 권위와 대표성을 지닌 사람은 없고, 오직 탐욕만이 서성거린다. 1987년의 패배를 벌써 잊은 것인가.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대통령 개인의 실패, 대통령제 제도의 실패에 국한되지 않는다. 밀실에서 나눠진 권력, 그것을 제어하지 못한 시스템의 실패로 더 많은 희생이 따를 수도 있다. 지금은 인간과 국가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 덕목마저 무너진 시대다. 촛불은 세상을 깨우는 빛이기도 하지만, 바람이 불면 결국 꺼진다. 더군다나 역풍이 불면 ‘밀실의 촛불’이 타오를 수도 있다. 우리 모두의 천적은 우리다. 문재인의 천적은 문재인, 안철수의 천적은 안철수다. 주장만 하고 대안이 없는 자가당착 정치에 빠질 거면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 우리는 속는데 지쳐있기에 또 속지 않는다.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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