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 대전복지효재단 대표이사
[시선]

요즘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1365년 고려 공민왕 14년에 왕과 금실이 좋았던 노국공주가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인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긴 왕은 7일마다 큰 재를 올려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었다. 3년동안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으며 왕륜사라는 커다란 절을 세워서 노국공주의 넋을 위로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정사에 흥미를 잃어버린 왕은 이전부터 가끔 왕을 자문해주던 승려 신돈에게 정치를 맡겼다. 다른 승려들과는 잘 어울리지도 않았던 신돈은 글을 몰랐지만 언변이 뛰어났다. 그동안 공민왕은 보우국사등과 함께 개혁정치를 펴려했지만 권력을 잡은 기득권자들은 자기 사람들만을 벼슬에 추천했고 학자들은 파벌을 이뤄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개혁정치를 하고자 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왕은 신돈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사를 맡기면서 ‘스승과 나는 사생을 같이할 것을 부처님과 하늘에 맹세한다’는 글을 써서 다짐을 받았다.

양반들을 싫어한 신돈은 원로대신과 공신들을 모두 몰아내고 새로운 인물들을 등용했으며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펴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왕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점점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방자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못해서 뜻이 있는 신하들이 왕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중에서 정추와 이존오가 올린 상소문을 보면 '신돈은 신하들의 자리에 있지 않고 감히 페하와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습니다. 말을 탄 채 대궐문을 드나들었으며 폐하의 용상에 걸터앉는 등 무례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돼있다. 그런데 왕은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쫒아 내버렸다. 재상인 임군보는 ‘아무리 나라에 인재가 부족하다 한들 미천한 중에게 정사를 돌보게 해 천하에 웃음을 사야겠습니까?’라고 임금님께 간청했으며, 대학자 이제현도 ‘뒷날 반드시 화를 불러올 것이니 너무 가까이 하지 마시옵소서’ 라고 간청을 드렸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돈은 궁궐 정문은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궁궐 뒤에 조그만 쪽문을 내서 수시로 드나들었다. 신돈은 궁궐 바로 뒤에 집을 지었는데 왕은 신돈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모든 일을 신돈과 의논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이렇게 되자 벼슬을 얻으려는 자들은 신돈에게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신돈의 바로 옆집에 살던 이운목은 신돈에게 딸을 주고 응양군 대호군이라는 벼슬을 얻었으며 신돈의 심부름을 도맡아했다. 벼슬을 얻고 싶은 사람들은 이운목을 통해서 뜻을 이뤘다. 그러나 신돈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왕은 신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왕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돈은 왕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기도 하는 등 역모를 꾀하다가 공민왕에게 들켜서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은 개혁정치를 꿈꿨지만 요승 신돈이 국사를 어지럽힌 일로 인해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게 됐다. 왜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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