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본사 편집국장
[나인문의 窓]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고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조선 중기 시인 임제(林悌)가 사도병마사로 임명된 뒤 임지로 부임하면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읊은 시조 중 한 구절이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그가 어느 날 말을 타고 외출하면서 왼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오른발에는 짚신을 신었다.

마부가 깜짝 놀라 “혹시 술을 드신 게 아니냐”고 묻자, 임제는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움질을 하던 추악한 세태를 이렇게 풍자했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내가 가죽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짚신을 신고 있다고 할 것이다. 누가 짝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겠느냐?”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1년 2개월여 앞두고 개헌론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말 바꾸기에 대한 속내가 무엇인지로 옮겨 붙고 있다.

박 대통령은 2007년 1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임기 말 갑작스레 개헌카드를 꺼내들자, 야권에서는 “최순실·우병우 등 권력형 게이트와 민생 파탄을 덮기 위한 꼼수 개헌, 정략적 방탄 개헌”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자신이 했던 말이 10년만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는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게이트'에 대해 대통령이 침묵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개헌이 모든 현안을 삼키는 ‘블랙홀’이 될 수도 있지만, 국정을 농단한 최 씨의 의혹까지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누가 대통령을 했느냐 보다, 어떤 대통령이었느냐를 더 중시한다. 그만큼 ‘물러난 후’가 더 어렵다는 것을 웅변한다. 가죽신이든, 짚신이든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겠지만, 외양보다는 늘 처신이 각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늦기 전에 국정농단의 실상에 대해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최순실 씨에게 사전 전달한 파문과 관련해 이미 고개를 숙였지만,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이미 대학가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진실규명과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대학가는 학생들에 이어 교수들까지 시국선언에 나서기 시작했다.

해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정권 말 국정게이트로 비화될 소지가 다분한 미르·K스포츠재단과 최 씨에 대한 의혹부터 해소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정은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박 대통령도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 실마리는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풀 수가 없다.

정치는 신의다. 신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정치는 패도다. 신의를 잃은 정치는 국민을 한 때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실기(失期)는 국력 낭비를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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