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3시반이 넘도록 '○○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보고 또 봐도 그냥 좋았다. 잠결에 고추도 심고 옥수수도 심었다. 지나친 상상 탓이었을까. 옥수수는 파종하자마자 하늘을 찌를 듯 키가 컸다. 평상에 널어놓은 고추 또한 방아를 찧을 만큼 금세 말랐다. 상추, 깻잎, 양파, 오이, 고추 등 푸성귀에 고추장 한 숟가락, 참기름 한 방울 넣어 쓱쓱 비볐더니 반찬이 필요 없다. 산야(山野)가 먹을 것이요, 지천이 누울 자리다. 꿈은 삽시간에 끝났다. 몇 번 뒤척였는데 먼동이 텄다. 출근시간이 된 것이다. 왜 이런 허망한 꿈이 그리웠던 것일까. 왜 이런 꿈이 갑자기 절박해졌던 것일까. 꿈은 너무도 싱싱했다. 아침상 앞에서 아내에게 물었다. "자연인이 되면 어떨까? 아니면 자유인이 되도록 놔줄래?"

▶자연인은 배고프게 먹고 춥게 자는 사람이 아니다. 따뜻하게 먹고 편안하게 잔다. '열 가지'가 아니더라도 '한 가지'에서 행복을 찾는다. 냉장고에 바리바리 채워놓지 않아도 웃음이 나오고, 찬이슬 내려앉는 방바닥이어도 웃음이 나온다. 이들이 산속에 은거하는 이유는 새로운 인생 2막의 희망찬 결정이었다기보다는 대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내려놓음으로써 채울 수 있었다. 도시를 내려놓고 자연을 얻었다. 안위를 내려놓고 위안을 얻었다. 돈, 명예, 권력을 내려놓고 힐링, 느림, 안식을 얻었다. 달리 말하면 '성공'이 아니라 '행복'을 찾은 것이다. 아무런 사심 없이, 욕심 없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자연인이다.

▶자연인은 도시인의 로망이다. 적어도 5060세대(넓게는 4070세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꿈은 작을수록 좋다. 크면 클수록 웃자란다. 물론 애초 꿈꿔온 자연인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냉혹한 단서는 따라붙는다. 그래서 자연인이 택한 곳은 '보기에' 좋은 곳이 아니라 '살기에' 좋은 곳이어야 한다. 혼자라도 밤의 적막과 정한을 견딜 수 있는 곳, 어릴 적 깨복쟁이(벌거숭이)로 마당에 떨어지는 빗속을 뛰어다녔던 그런 '날것'이어야 좋다. 그래서 자연은 아무 조미료도 넣지 않은 '날것'이다. 아, 자연의 품속에서 가슴속 상처를 씻어내고 싶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사면초가의 불편함보다는 낫지 않으리오.

▶나인 앤 나인(9&9:오전9시 출근, 오후9시 퇴근)의 삶에는 저녁이 없다. 저녁의 풍경은 바짝 말라있다. 그리고 항상 같다. 99%의 사람들이 퇴근한 사무실은 적요하다. 혹여 누가 밟기라도 하면 낙엽처럼 바스스 깨질 것만 같다. 거울에 비친 몰골은 이미 세상 밖이다. 그래도 소주가 당기는 건 살아있다는 증표다. 소주 마실 힘도 없다면, 버텨낼 힘조차도 없을 것이다. 주소를 잃지 않고 귀휴할 수 있는 정신력에 한 가닥 위안을 삼는다. 상처 받은 자들의 귀휴지, 자연인이 되고자 하는 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도 그런 삶에는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별안간, 생고생이 그리운 것은 아이들이 커서일까, 내가 작아져서일까.

나재필 편집부국장 najepil@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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