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산 대전 유성온천역장
[시론]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이 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에게는 신앙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여러 번의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금서(禁書)로 취급됐다. 원본이 없기에 조금씩 내용이 다른 70여 종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예견했다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나라가 어려울 때 정(鄭)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출현해 이씨조선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한다.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렸음에도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정도령이 출현해 통일을 이룬다는 수군거림이 정계 뒷골목에서 상당기간 떠돌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故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다. 그가 대선출마를 위해 만든 당 이름은 ‘통일국민당’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그의 아들 정몽준 前 한나라당 당대표는 지난 2002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월드컵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여세를 몰아 ‘국민통합21’을 창당해 16대 대선에 나섰다. 결과는 노무현 후보로의 야권단일화였다.국민의당 정동영 의원은 2007년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출마해 617만표를 얻어 1149만표를 받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크게 패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절 국회의원인 정 후보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김근태 의원을 통일부장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정 후보가 강력히 반발해 자리를 서로 맞바꿨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과학계 원로인 정근모 前 과학기술부장관도 17대 대선에 출마해 1만5000표를 받았다. 그가 등에 업고 나온 참주인연합은 후에 친박연대의 모태가 됐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2002년 서울대총장 취임이후 대권후보로 꾸준히 거론됐다. 충남 공주출신으로 2009년 이명박 정부의 총리직에 올라 세종시 원안반대에 앞장 서 충청권에서 매향노 비난을 자초했다.

최근 눈길을 끄는 인물은 정세균 현 국회의장이다. 전북에서 4번 내리 당선된 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를 서울 종로로 옮겨 두 번 더 연임에 성공했다. 정 의장은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당내경선에도 나섰다. 지난 6월 의장 취임 일성이 개헌이었다. 취임식에서 현 정권에 쓴소리도 냈다. 지난 주말에는 여당 반대를 물리치고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해임건의안을 표결 상정해 통과시켰다. 정 의장 성(姓)은 나라 정(鄭)이 아니라 고무래 정(丁)이다.

직전 국회의장을 지낸 정의화 前 의원은 최근 ‘새한국의 비전’이라는 정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아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과 개헌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도 현역 시절 대권 의지를 드러냈다. 충북 청주를 지역구로 충청권 대망론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4선의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도 지난 8월말 싱크탱크격인 ’더좋은나라 전략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충남 공주에는 역시 4선의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서울 중구에서 8선 의원을 지낸 故정일형 박사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인 정대철 前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과 손자인 정호준 前 의원에 이어지는 60여년의 정치 가문에 큰 꿈이 없다고 볼 수 없다.

현대적 의미의 정도령은 민생을 든든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인물이다. 예언서들은 인물이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차기 대선까지 1년 3개월 남았다. 벌써 십 수명의 후보군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무슨 성씨가 중요하겠는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자는 하늘이 만든다고 했다. 국민이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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