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61)성희안이 왕이 내일 임진강변 장단(長湍) 석벽(石壁)에 놀러 가기로 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 구월 초하룻날이었다.성희안은 즉시 박원종을 찾아가 입수한 정보를 이야기하고 의거를 독촉하였다."그렇다면 천재일우의 기회요. 내일 금상이 성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려 성문을 모두 닫고 동병(動兵)해야겠소.""동병하기도 전에 휘하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60)"한(漢)나라 광천왕(廣川王)은 또 어떻구요. 키가 일곱 자 반이 되었다니 외양부터 장승 같았을 것 아니오. 광천왕도 호색가였는데 잔혹하고 변태(變態)가 심하기로는 은나라 주왕 못잖았던 모양이오. 소신(昭信)이라는 후궁에게 침혹(沈惑)하였는데, 소신을 참소하는 여인들을 자기 면전에서 죽이게 하고 이를 목격한 시녀들 수십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9) "도대체 금상이 사람을 몇 명이나 죽여야 직성이 풀릴지 모르겠구려.""무오년과 갑자년에 죽인 사람만도 부지기수인데, 옛날 중국의 폭군들에 뒤질까 보아 앞으로도 무수히 죽이려고 할 거요."이때에 바깥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하인이"저, 정부인(貞夫人) 마님께서 주안상을 차려 내보내셨습니다요"하고 아뢰는 것이었다. 박원종의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8) 신윤무는 진즉부터 박원종의 집에 자주 왕래하며 그와 친분을 맺었지만 민심이 흉흉한 시국 이야기는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으면서도 박원종이 비분강개하여 반정을 생각하고 있는 속마음을 은연중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성희안은 신윤무의 주선으로 어느 날 밤 은밀히 박원종을 방문하여 밀실에서 단둘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밀담을 나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7) 박원종은 사람 됨됨이가 잘나고 일찍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 출입하는 무사가 많았으며, 그가 임시로 귀경(歸京)하여 집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도 벌써 전날의 부하들이 연락 부절로 드나들었다.성희안은 이 점에 착안하여 박원종을 설득해 함께 의거할 생각을 하였으나 서로 상대를 알면서도 친한 정분(情分)이 없어 속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6)성희안(成喜顔)은 성종 때 옥당(玉堂-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금상(연산군)이 왕위를 이은 뒤에는 이조참판이 된 사람이었다.한번은 왕이 양화도(楊花渡)에 놀러 가면서 다른 신하들과 함께 성희안을 데리고 갔는데, 양화도 경치를 보고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라 하였다.성심원불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5) 그 무렵에 왕의 백모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중병에 걸렸다.박씨는 수십년을 수절하며 불교를 혹신하여 망부(亡夫) 월산대군의 묘 옆에 원찰 흥복사를 세우고 명복을 비느라고 그 절에 자주 왕래하는 바람에 혹시 실절(失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왕이 박씨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 황을 맡아 양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4)녹수가 갑자기 훌쩍거리며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전비도 덩달아 눈물을 흘리며 훌쩍훌쩍 울었다.왕은 의아하여 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아니, 너희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눈물을 흘리니 무슨 연고인고?""전하께서 방금 들려 주신 풀피리 소리가 너무 처량하여 신첩들이 언제 갑자기 불행해질지도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 (53)이장곤은 생김새가 기걸(奇傑)스러워 어려서부터 장수감이라는 말을 들었다. 금상(연산군) 8년에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에 발탁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남해(혹은 거제도라는 기록도 있음)로 유배되었는데, 뱃길로 함흥(咸興)까지 도피하였던 것이다.이장곤은 멀리 도피하고도 그가 거병하여 서울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풍문의 주인공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2)왕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사대부의 친상(親喪)을 단축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궤이(詭異)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三鋼)이 끊어지고 이륜(彛倫)이 소멸되었다.그래서 모든 사람이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1)며칠 후 왕이 전교를 내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하필이면 생모의 기일에 그런 야만적인 행위를 한 저의(底意)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50)팔월 한가윗날은 왕의 생모 윤씨의 기일(忌日)이었다.왕은 전날부터 생모의 기일에 제사가 아니면 차례(茶禮)라도 올릴 준비를 하라고 분부했을 법도 한데 추석 당일 아침까지 일언반구도 없었다.승정원에 입시한 승지들은 이상하다며 수군거렸다."오늘이 한가윗날인데 주상전하께서 아무런 분부도 내리지 않으시니 어떻게 된 영문이오?"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9)좌의정 박숭질이 낙마(落馬)하여 골절상을 입고 집에서 요양을 한 것이 석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동료 대신들과 재상들은 박숭질이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오지 않는 것이라며 수군거렸다."박 정승이 한두 달도 아니고 석 달이나 조정에 못 나오시니 국정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이오.""전하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8)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7)…운평으로서 세 번 간음한 자는 이미 엄한 법으로 다스리고 있는데도 창기들은 일정한 뜻이 없이 들따오기 같은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제 스스로 만세 뒤에라도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무리들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난 불충이 되고 여자의 도리에도 벗어난 사음(邪淫)이 되니 죄가 크다.너희들은 구중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6)가소로운 일이지만 왕은 사내들의 노리개감이던 창기와 관비 출신인 흥청들에게 절개와 지조를 지킬 것을 강조한 전교를 내린 적이 있었다.그 전교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5)임금을 비롯한 왕족들 외에는 궁중에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궁녀들은 평생을 궁중에서 살지만 궁중에서 죽을 권리는 없었다.창덕궁에는 요금문(曜金門)이라는 문이 있었다. 금호문(金虎門)에서 원서동(苑西洞)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궁 밖으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든 요금문은 환자나 다 죽게 된 사람이 나가는 문이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4) 도대체 왕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옳고 그르고 간에 시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조정이었다.그리하여 처음에는 잔치 때에만 쇠고기를 썼으나 나중에는 보통 때도 흥청을 공궤하는 데까지 쇠고기를 쓰니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暑)에서 날마다 10여 마리씩 잡아 수레로 실어 갔다.얼마 못 가 사축서와 전생서에서는 더 잡을 소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3)"여보시오! 위차(位差) 양반, 살려주시오. 내 관고(官庫)를 털어서라도 액수를 맞추어 드리리다."가짜 위차라는 자에게 멱살을 잡히고 목숨이 달아날 것이라고 협박을 당하고 나면 사또는 그만 새파랗게 질려 두 손을 싹싹 비빌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흥청이 한번 대궐에 들어오면 승은한 천과흥청이든 아직 승은하지 못한 지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南柯一夢(42)"장녹수 년 혼자 다 해먹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나주(羅州)년들 세상이로구나."이런 말이 나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나주 기생으로 흥청이 된 금성춘과 역시 나주기생으로 흥청을 거쳐 숙의가 된 백견, 그리고 나주의 관비 출신으로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숙화 등 나주 계집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들의 부모나 친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