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우듬지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저물던 태양 빛도 무심한 듯 제빛 한 줌을 보태고 독야청청하던 청솔 나무도 시월에는 회색빛 방울 견장을 준비한다. 아직은 여름날의 열기가 남았으나 산천은 시월을 준비하는 몸짓들로 부산스럽다.시월은 풍유와 허전함의 시간이다. 수확에 바쁜 들은 사뭇 부산스럽지만, 볏짚 둥치가 뒹구는 모습은 풍유 속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갈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결이 어디 있으랴. 계절을 분간 못 한 민들레가 바지런한 할머니 손에 뽑혀 빨간 바구니에 소복이 담긴 모습도 시월의 풍경이 된다.
왜 이리도 마음이 모질지 못할까. 크게 마음먹고 돌아섰건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어느 순간 화분 하나를 손에 집어 들고 말았다. 며칠 전부터 정원에 그득하니 자리하고 있던 오래된 화분들을 정리하자고 큰맘 먹지 않았던가.헐렁해진 정원의 여백을 느긋하게 즐기며 이젠 과욕을 부리지 말자 했거늘 며칠 전 각오가 무색하게도 꽃집 앞을 지나다 또 분 하나를 들고 와 한 자리에 터를 잡아 앉혔다.베란다를 정원이라고 이름하기엔 너무도 허름하고 작았지만 나름 계절의 변화를 느낄 만큼은 각기 다른 생명이 그득했다. 그곳은 풀죽은 자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시청자미디어센터는 시민들이 미디어를 활용해서 건강하게 소통하는 행위를 도와주는 공공시설이다. 이러다 보니 급변하는 미디어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 틱톡 등을 살펴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다. "10년, 20년 후에는 사람들이 어떤 미디어 플랫폼을 사용할까? 과연 그때도 지금의 미디어 이용패턴이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이다.180여년 전 단방향 소통방식인 사진, 영화, 라디오 등이 출연했을 때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디어였다.인류는
모처럼 북적거린다. 차와 사람이 뒤엉킨다. 인도는 노점상이 차지하고 사람들은 차도로 다닌다. 허리가 구부러진 어르신도 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도 차와 뒤엉키어 위험천만이다. 누구 하나 안전을 지도하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살아나 거리를 빠져나가야 한다. 추석절이나 장날만의 풍경이 아니다. 날마다 그렇다.인도를 빼앗기고 차도를 걸어야 하는 주민들은 불만이 가득하다. '차를 못 다니게 하든지, 노점상과 적치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일방통행도 제안한다. 북적거림에 모처럼 활기를 띤 상점가와 다르게 걸을 수 있는
때론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아니 매 순간 힘겨운 결정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집단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에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며칠 생각이란 것을 하지 말자며 24시간 죽은 듯 잠든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없이 푹신한 침대 속에서도, '나는 지쳤어. 힘들어'라고 소리치며 떠난 여행길에서도, 어김없이 돌아와 삶을 이어간다. 이전보다 힘차게 속도를 내기도 하고 간혹 브레이크를 밟아 느린 속도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삶의 방식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사는 것처럼
한줄기 불어오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작은 종의 울림이 청아하다. 종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벌써 내 가슴 한쪽에서는 선들바람이 지나간다.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날의 상흔이 아직 남아있건만 입추와 처서가 지나니 가을 안으로 감성이 먼저 들어가 앉았나 보다. 칠월 여드레, 내 생일만 지나면 밤마다 화려한 은하수 별빛이 땅에 내리고 벼 이삭이 여무는 가을로 접어든다던 엄마의 말씀이 오래전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하다. 가을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왜 마음은 뜬금없이 서글퍼질까. 자식들의 효성으로 차려준 풍성한 생일상을 받은 것이 엊그제건만 채워지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대도시 파리를 지배하는 시각적 자극을 “문화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칩입하는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산업화와 함께 성장한 도시는 산업화 이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자유, 소비문화의 규격화, 개인화, 시각문화의 폭발, 빈부격차 등의 측면에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중 도시는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서 유독 시각을 자극한다. 지금부터 10년 전 서울 삼성동에서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대 규모로 개최된 밀랍인형 전시회인 '월드 스타체험전'에서 경험한 느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덕분입니다. 송씨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생명은요.”, “사망입니다” 피곤에 쌓인 경찰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지난 15일간 경찰은 실종된 송씨를 찾기 위해 밤·낮·우중·휴일을 가리지 않고 전력투구 하였다. 보은소방서,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보은군청 등 기관의 협조와 수색견을 투입해도 실종자의 행방을 찾을 수 없자 8월 11일부터 민·관 합동 공개 수색을 시작했다. 필자에게 보은경찰서에서 연락 온 시점이다.실종자는 지난달 30일 속리산 법주사에서 열린 '미디어 아트쇼' 빛의 향연을 보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법주사
너럭바위 중앙이 떡하니 벌어져 있다. 정을 맞은 것도 벼락을 맞은 것도 아니다. 돌이 갈라진 틈새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나다니 참으로 뜻밖이다. 나무가 바윗돌을 부수어 보금자리를 잡고자 욕심낸 흔적은 없다. 바위의 배려인지 나무의 도전인지 모를 특별한 모습에 호기심이 일어난다.너럭바위는 어찌 단단한 제 몸을 갈라 품지 못할 것을 품었을까. 바위와 나무가 애초에 있던 장소는 식물원은 아니다. 바람이 많은 제주의 어느 오름쯤이었으리라. 특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에 낯선 곳에 옮겨 오게 된 것이다. 식물원에는
능소화가 졌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머금고 만개하던 능소화가 한줄기 소낙비에 꽃송이를 뚝뚝 떨구었다. 송이송이 떨어져 땅바닥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사그라져가는 모습이 가히 처연하다. 분명 곱디고운 꽃이지만 함부로 손을 내밀어 쉽게 꺾지 않던 꽃, 아무나 실없이 내미는 손길에 결코 쉬이 맞잡아주지 않을 것 같은 주홍빛 능소화의 차가운 매력으로 한여름을 더 강렬하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능소화 매력에 반한 양반들이 양반 꽃이라 불렀으며 상민 집에는 심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누구나의 손길을 수더분하게 잡아주는 순진무구한 온화함이
또 한명의 악우(岳友)가 히말라야의 별이 되었다. 열 손가락 없는 장애인 김홍빈 대장이다. 김 대장은 광주 송원대학교 산악부 83학번으로 필자와 같은 동시대 산에 다닌 친구다. 황소보다도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 김 대장은 1991년 맥킨리 단독등반 중 조난으로 인해 열 손가락을 자르는 수술을 했다. 그 후 장애인 알파인스키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투혼을 불살랐다.그런데도 그가 가지고 있는 DNA는 그를 다시 산으로 인도했다. 12년에 걸친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이어, '2006년 가셔브롬 2봉 등정을 시작으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멀리 산 능선이 선명하다. 가을날 풍성했던 논두렁 길엔 미루나무 홀로 바람을 등지고 서 있다. 택배기사 이현영 화가의 그림이다. 나무는 화가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이다. 때론 작은 나무둥치가 때론 아름드리 둥구나무가 등장한다. 전시회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 앞이다. 그림은 마치 울울창창한 숲속에 든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앞에 머문 관람객도, 사진을 찍는 지인의 눈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나 또한, 숲속 향기에 취하여 자리를 뜨지 못한다.이현영 화가의 직업은 택배기사이다. 그림 작업은 주말이나 자투리 시간에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