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돌아가는 꼴이 갑갑(甲甲)하다. 그 진원지는 비행기다. 고작 땅콩 몇 알, 라면 한 봉지, 티켓 한 장 때문에 갑(甲)질 횡포가 터지고 있다. '땅콩 회항' 조현아 부사장은 악어의 눈물로 사죄했지만 결국 수형번호 '4200번'을 달고 감방에 갔다. '라면 상무'로 악명을 떨친 포스코 간부는 라면이 짜다며 승무원 얼굴을 때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가하면 모 의류회사 회장은 항공기 출발 1분 전에 나타나 게이트를 열어주지 않는다며 항공사 직원을 신문지로 때려 '신문지 회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또 한명의 기내 진...
▶와신(臥薪)하지 못했다. 그래서 밤새도록 꿈결에 담배를 피웠다. 꿈에서 피우니 밤이 낮처럼 밝았다. 먼동이 터오는 시간이 되서야 금단의 멍울이 가셨다. 허파꽈리가 타들어가도록 양껏 빨았더니 새벽공기는 쓰디썼다. 날숨과 들숨 또한 괴로웠다. 이제 담배와 이별할 시간이다. '4500원×31일=13만 9500원, 13만 9500원×12개월=167만 4000원, 167만 4000×20년=3348만원'이라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담배 끊는 것이 타당해졌으니 도리가 없다.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더러워서 끊는다. 어두운 골목과 그림자...
▶비열한 바람 한줌이 창살을 훔치던 그날 밤, 갑(甲)과 을(乙) 여럿이 밀실에 모였다. 잠시, 모호한 침묵이 흘렀다. 이들은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지 서로 분간하지 못했다. 순간, 음습한 목소리가 칼에 베인 듯 암전을 깨웠다. 'A사를 깎아내리는 광고를 실어주시오. 광고비를 넉넉히 지불하겠소.' 그 부도덕하고 추잡한 제안을 한 자는 궁지에 몰린 사업가였다. 목소리는 몹시 떨렸고 자세는 매우 불편했다. 남몰래 뭔가를 꾸미는 자는 두 다리를 펴서 앉지 못한다. 야합은 결렬됐다. 상도(商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
▶꽃이 산을 넘고, 강이 세월을 뛰어넘는 강원도 두메산골, 98세 할아버지와 89세 할머니의 명랑한 순애보(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화제다. 14세 촌색시와 23세 떠꺼머리총각은 76년 전에 만나 아름답게 백년해로한다. 봄엔 꽃놀이를 하며 '나 이쁘오?' 애교를 떨고, 여름엔 물장난을 친다. 가을엔 낙엽을 쓸다말고 서로를 쓰다듬고, 겨울엔 눈싸움을 하며 티격태격한다. 할머니 손이 시리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호호~’하고 입김을 불어주기도 한다. 둘은 어디를 가든 고운 빛깔의 한복을 커플로 맞춰 입고 다닌다. 그것도...
▶헝가리 미슈콜츠는 중세시대에 멈춰있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를 음미할 수 있는 건 클래식한 분위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지만 동시에 멈춰있고, 멈춰있지만 동시에 펄떡인다. 인간을 품은 성모 마리아 순례길, 도심 한가운데로 흐르는 실개천, 사람과 삶을 감싸 안은 길목, 다운타운의 시민광장, 소담스런 벼룩시장과 파시 같은 야채시장, 잔잔하게 도열한 바로크 교회, 700만년 세월을 담은 빛바랜 박물관, 폭포와 동굴온천…. 도시는 이 많은 것들을 오롯이 풍경에 담으면서 덜컹거린다. 이 지상 최고의 중세 여행은 바로 트램(노면전차)에...
▶알고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보고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자동차전문정비업 허가도 받지 않은 무자격자가 차량을 고치는데 눈감아주란 말인가. 같은 판매점에서 똑같은 타이어를 다르게 파는데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얼뜨기가 사면 덤터기 쓰고, 반골이 사면 덤(할인)을 주는 꼴을 보고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판매점마다 천차만별인 가격을 보고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위태위태한 옥외광고판이 버젓이 안전을 위협하는데도 눈감아주란 말인가. 정녕 모른 체 하란 말인가. ▶묻겠다. 불법마저도 용인하는 게 기업 살리기인가. 탈법기업 떠난다고 애걸복걸 읍소...
▶진달래 커피를 아시는가. 봄날의 진달래를 상상하지 마시라. 커피에 진달래 한 잎 띄웠다고도 생각하지 마시라. 이 커피는 그냥 '진'하고 '달'게 먹는 커피를 말한다. 진달래의 분홍은 붉음보다 못하고 맑음보다는 치열하다. 그래서 진달래 커피는 '에스프레소(Espresso)'가 아닌 쓴맛과 단맛이 어우러진 '카푸치노'다. 때문에 분홍 맛이다. 여기에 가미되는 설탕과 프림은 밤낮을 뒤섞으며 동침한다. 설탕은 커피를 살살 녹이기 위해 온몸을 투신하고, 원두(原豆coffee)는 그 옆에 와신(臥薪)하며 속삭인다. "사랑해, 고마워…....
▶30년 전 아버지는 자식의 공납금을 위해 밭뙈기를 팔았다. 소도 팔았고 키우던 강아지도 팔았다. 그런데 언젠가 사과 한 알을 몰래 따먹었다가 혼꾸멍난 적이 있었다. ‘자식농사’를 위한 밑천이 ‘과수농사’였는데 왜 썩은 걸 먹지 않고 온전한 걸 먹었냐는 게 이유였다. 과수원집 아들은 까치가 쪼아 먹다 남긴 사과를 먹고, 슈퍼마켓 아들은 유통기한이 끝난 과자를 먹어야한다는 걸 잠시 잊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죄라면 배고픈 입(口)이 문제였으니까. 그 사건이후 난 사과를 돈 주고 사먹지 않는다. 비싸서가 아니라...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아들은 학교를 향했다. 그리고 어둠이 먹물처럼 사위(四圍)를 감쌀 때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둠에서 출발해 어둠으로 귀휴하는 그 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마는, 난 단 한 번도 자식의 안녕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인생에 대해서도 말을 섞지 않았다.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고, 말하고 싶었으나 침묵했다. 난 항상 바빴고,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간혹 궁금하고, 묻고 싶고, 말하고 싶을 땐 여지없이 취해있었다. 그래서 또 침묵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흐르는 '의도된 부침(...
▶“오! 커피…. 수천 번의 키스보다 매혹적이고 달콤해.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하구나.” 1980년대 어느 음악다방 뮤직 박스에서 디스크자키가 LP(Long Play)판을 틀어주고 있다. 무스를 잔뜩 발라 앞가르마를 내고 도끼 빗을 뒤에 꽂은 허리케인 박이다. 1분에 33번 회전하는 직경 12인치(inch) 턴테이블 LP판을 닦고, 얹고, 돌리면서 한껏 개폼을 잡는다. 다방 레지는 청마 유치환의 시를 줄줄 외면서 값싼 커피를 팔고, DJ에게 홀딱 반한 여자는 거의 실신 직전이다. 7080세대의 이 어색한...
▶지난겨울이 그렇게 춥더니, 또 한기가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부고(訃告)가 날라든다. 이 계절엔 특히 그렇다. 잊지 않으면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볼 수만 있어도 보인다고 여겼는데, 모두의 안녕을 묻는 이 시간이 황망하고 당황스럽다. 동토(凍土)의 세상이란 언제나 쓸쓸하다. 입이 굳고 말이 굳는다. 이 벼린 겨울이 지나면 차갑고 매정했던 오한마저도 못내 그리울 텐데 '겨우살이'의 어근과 어미가 죽음을 알린다. 그림도 언어다. 풍경도 언어다. 저마다의 얼굴을 가지고 소리를 낸다. 겨울은 '겨울'하고 소리 낸다. ▶어릴...
▶베를린 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쓴 케냐의 키메토는 6년 전까지만 해도 옥수수를 키우던 가난한 농부였다. 하지만 그는 2시간2분57초라는 세계신기록의 보유자가 됐다. 이는 42.195㎞를 100m당 평균 17초48의 속도로 뛴 것인데, 보통 사람들에겐 전력 질주에 가깝다....
▶2006년 2월 27일은 개인적으로 기록에 남는 날이다. 차가운 머리로 뜨겁게 사표를 낸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창밖엔 식지 않은 겨울이 웅크리고 있었고 바람은 체온보다 냉랭했다. 내연기관의 입김은 당혹스럽게도 겨울보다 빨리 얼었다. 그리고 천국을 보았다. 행...
▶인생은, 아니 인맥(人脈)은 마블링(Marbling)이다. 켜켜이 쌓인 인연들이 연하게 섞이면서 통섭의 띠(끈)를 만들기 때문이다. 살코기의 단백질이 지방(脂肪)으로 변하듯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게 된다. 물과 기름이 섞일 때는 ‘불’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 ‘...
▶가을은 연어의 고향이다. 이들은 강에서 태어나 몇 개월쯤 살다가 바다로 떠난다. 대양(大洋)의 꿈이다. 어릴 적부터 품는 희망의 그릇이 사람의 포부보다 크다. 치어가 두려움을 깨고 바다로 나가는 건 두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는 도전이다. 바다는 ...
▶골초였던 시인 오상순은 '꽁초'에서 음을 따 공초(空超)라는 호를 만들 정도로 끽연가였다. 비움마저도 초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담배연기가 곧 비움이고 채움이었다. 오죽했으면 헤비스모커(하루 100개비 이상 피움)인 그를 위해 전매청에서 매일 담배 10갑을 공짜로 ...
▶중국 계몽주의 지식인 량치차오(梁啓超)는 1910년 ‘조선 멸망의 원인’이란 글에서 우리 민족성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조선 사람들은 화를 잘 낸다. 모욕을 당하면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난다. 그러나 그 성냄은 얼마 안 가서 그치고 만다. 한번 그치면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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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을 통해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성계는 개경의 지기(地氣)가 쇠락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수도를 옮기려했다. 500년 도읍지 개경(개성)이 두렵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개경의 권문세족과 백성들은 새 왕조의 탄생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악몽에 시달...
▶세종시의 얼굴은 깊다. 밤의 눈빛은 화려하지 않으나, 그윽하다. 마천루가 된 도시는 세종 동진뜰 밀마루에서 잃어버린 꿈과 잊어버린 언어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2000년 역사의 파리와 런던,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3000년)에 비할 바 못되고, 예루살렘(6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