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란 말은 왜 이리 슬플까.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섬섬옥수를 저며 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하루의 얼룩들을 씻어내는 씻김굿이다. 우린 한평생(결혼생활 60년·하루 평균 60분 기준) 설거지에만 2만1600시간(900일)을 바친다. 자그마치 2.4년이나 부엌 개수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삼시세끼 후 쏟아내는 그릇들은 산더미다. 네 식구 기준이면 밥그릇·국그릇만 8개요, 반찬그릇 데커레이션도 10여개를 넘는다. 프라이도 하고, 생선까지 굽는다면 이제 설거지는 허드렛일이 아니라 노동이다. 맞벌이 시대, 남자들은 세차를 ...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그런데 사실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잠 못들었다는 것이 팩트다. 눈만 감고 있었지, 의식은 내내 깨어있었다. 물론 잠을 자기 위해 자정부터 엄청난 공을 들였었다. 생각의 다산(多産)은 불면을 부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지랖 넓게) 가뭄걱정도 하고 역사교과서 걱정도 했다. 22조원이나 처들인 4대강도 떠올랐다. 강을 판 것인지, 운하를 판 것인지 도통 모를 그 미증유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한 백성의 망상이 당최 옴나위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새벽 4시20분에 자리를...
▶질풍노도의 계절이다. 찬바람이 옷깃에 닿자마자 마음이 얼어붙는다. 바람이 성나고 사람이 성나고 마음이 성난다. 이럴 땐 따뜻한 국물이 필요하다. 탕(湯)은 마음의 온도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 맑은 국물 속에 오사바사한 정이 들어있고 사근사근한 배려가 녹아있다. 그런데 따뜻해지고 싶은 계절엔, 차가운 사람들이 두려워진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 사람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의 몽니가 두려운 것이다. 괜히 시비 걸고, 몽짜 부리고, 남 탓만 하는 군상들이 많아지고 있다. 몽니 부리는 사람들의 화(火病)는 얼굴에 깊...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골목에 허름한 단골술집이 있다. 땅거미 어스름 내려, 꽃등불이 켜지면 으레 습관처럼 기어드는 곳이다. 이곳을 번질나게 가는 건 진짜 버릇 같다. 물론 안주솜씨가 특별하다거나, 여주인의 맵시가 특별하지도 않다. 그런데 얼마 전 '거래'를 끊었다. 그날따라 현찰이 없어 소주 한 병 값(3000원)을 외상으로 달려고 했는데 그녀가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근 10년 간 기천만 원은 족히 갖다 바친 곳인데 너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주인은 시시때때로 계란프라이 서비스를 원하는 주객을 '잠...
▶어둠속을 혼자 걸었다. 아스피린 몇 알 먹고도 가시지 않는 편두통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난 시시때때로 꽤 심한 두통을 앓곤 했다. 그때마다 혼자 걸었다. 갈 길을 정해놓지 않고 무작정 걷다보면 무슨 처방을 받은 것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그때 이후론 두통의 조짐만 있으면 일부러 걷는다. 걷는 것은 정리하는 행위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몸을 정리하고 일상을 정리할 수 있다. 더욱이 어둠은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전경의 일부를 삼켜버리며 고뇌를 분쇄한다. 밤이 되면 일상의 소리가 잦아들고 생각의 데시벨이 높아지는 법이다. 감질나지만...
▶고향 수안보에는 '가족탕(온천목욕탕)'이라는 게 있었다. 공중목욕탕에 다다미방 같은 작은 가족실이 여럿 딸려있는데 일제강점기 온천여관에서 비롯된 형식이었다. 조금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나신을 보는 게 아니라 나신을 닦는 도량이니 부끄럽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 뿌연 김이 자욱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색 타일 바닥, 온도 표시도 없는 온탕·냉탕 욕조가 달랑 2개 있었다. 섭씨 59℃짜리 온천수를 43℃로 식힌 온탕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고, 냉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가족 전체가 발가...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결도, 볕도 제법 냉소적이다. 가을은 1년에 4분의 1정도 할애되지만 훅 왔다가 훅 간다. 이런 좋은 날들이 오면, 있는 힘껏 가을볕의 온도를 잡아야한다. 만약 한가롭게 안부를 묻고 있다가는 별안간 겨울을 맞는다. 가을은 냉혹한 겨울의 사전답사다. 예비하지 않으면 지난 겨울의 뼈마디 시렸던 기억만이 폐부를 찌를 뿐이다. 여름의 최절정 진앙에서 벗에게 안부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더위 안에 있는가? 더위 밖에 있는가?" 벗은 삼매(三昧·한 가지에만 몰입함)중이라고 했다. 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돈 버는...
▶개별적 삶은 없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만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은연중에 그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남의 행복을 빌지만, 막상 그가 웃고 있으면 기뻐하지 않는 게 사람 심보다. 누군가에 대해서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갈등을 만드는 게 불편하지만 타인들은 '불편한 것'들만 만들어댄다. 그런데 말본새가 세련되지 못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누구답게' 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들은 시시때때로 들통이 난다. 자신의 뇌가 자신을 속이니...
▶페널티킥은 심리전이다. 골대 안으로 공이 빨려 들어가는 시간은 0.5초, 세계 정상급 골키퍼가 폭 7.32m의 골대에서 반응하는 시간은 0.75초다. 결국 킥이 정확하다면 아무리 뛰어난 골키퍼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 열 번 차면 세 번은 실패한다. 이쪽으로 찰까, 저쪽으로 찰까 고민하다가 헛발질을 하는 것이다. 골키퍼의 57%는 오른쪽 방향으로, 41%는 왼쪽으로 몸을 날린다고 한다. 중앙에 그대로 서 있는 경우는 고작 2%. 그래서 중앙으로 찼을 때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키커는 왼쪽 오른쪽으로만 차고, ...
▶1956년. 중국 충칭시 가오탄(高灘)촌에 살던 20살 청년(류궈장)은 10살 연상이자 아이가 넷 딸린 과부(쉬차오칭)와 사랑에 빠졌다. 마을사람들은 과부가 총각을 꼬드겨 욕심을 채웠다며 쑥덕거렸다. 따가운 시선을 받던 두 사람은 해발 1500m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젊은 남편은 화전을 일구고 가축을 치는 고된 일과에도 아내를 위해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다 돌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로지 망치와 정, 삽 하나로 6000개의 '사랑의 하늘 계단'을 놓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계단 옆에는 작은 구멍을 따로 만들어 ...
▶학창시절의 기억은 공부보다는 노동에 방점이 찍힌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당시, 배꼽시계는 점심이 되기도 전에 요란스럽게 울렸다. 간간이 새참으로 실핏줄의 고단함을 풀긴 했지만 돌아서면 또 배고팠다. 뱃속에 '거지'가 산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부러 거지처럼 굴어 일의 양을 줄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첫새벽부터 밭고랑을 매니 입에선 단내가 났다. 친구들이 공을 차러 가는 시간에 삽을 드는 건 눈물이었다. 때로는 고추와 호박을 땄고, 때로는 과수원 농약 치는데 온종일을 보냈다. 왜 어른들이 '뼈 빠지게'라는 관용구를 입에 달...
▶땅이 부글부글 끓는다. 태양도 자신의 붉은 몸을 견디지 못해 구름 뒤로 몸을 숨긴다. 그 비등점은 사람들의 육체와 마음까지도 까맣게 태워버린다. 습기 머금은 바람 또한 지난겨울의 빙점을 잊어버렸다. 낮엔 폭염, 밤엔 열대야(夜), 태양의 저격을 잠시도 피해갈 틈이 없다. 몸에서 '화가 나는 건' 그냥 본능인데 맘에서 '화가 나는 건' 불능 아닌가.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 건 마음에 박힌 못 하나 때문이다. 버럭 성을 낼 수도, 그냥 꾹 참고 삭일 수도 없는 이 불편한 나날들, 이럴 땐 줄행랑이 상책이다. 숨어봤자 ...
▶①끈적이는 시선과 춘정이 점멸하는 S노래방에서 남자교사가 여교사의 몸을 더듬으며 블루스를 추자고 치근덕댔다. 옷이 뜯겼다. 여교사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자 바로 옆에 앉아있던 교장이 오히려 여교사를 나무랐다. 이후 1년 넘게 여자교사는 야만인들의 소굴에서 굴욕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②남자 교사 A가 여학생을 상담실로 불렀다. 그는 다짜고짜 여학생 허리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주물렀다. 심지어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맨살을 만지고 가슴까지 만지려했다. 영어교사 B는 여학생들에게 황진이, 춘향이 등의 이름을 붙이거나 연예인과 성관계하...
▶부모는 자식을 위해 일하고 자식을 위해 온전하게 버틴다. 이런 일련의 무한희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숙명처럼 계승돼온 업보다. 자식 생각에 안 먹고, 못 입고, 안 즐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니 이처럼 우매한 '불치병'도 없다. 그러면서 속으로 다짐한다. 자식들이 온전하게 크고 나면 신나게 먹고 입고 즐길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즐기려고 작심했을 땐 이미 폭삭 늙어버린 나이가 된다. 여행을 시켜줘도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그림의 떡이다. 맛있는 음식을 사줘도 치아가 좋지 못해 그림의 떡이요, 좋은 옷을 입혀도 가늘어진 뼈마디...
▶북적이던 집이 텅 비었다. 아내와 막내는 캠핑을 떠났고, 큰애는 동아리 MT에 갔다. 호젓하게 혼자 있고 싶었던지라 기꺼이 빈집에 남았다. TV와 선풍기, 노트북을 켜놓고 빈둥빈둥 돌아가는 세상의 시계는 껐다. 배고프면 주전부리를 하고, 노곤해지면 침대에 몸을 누였다. 무념무상, 분명히 호사였다. '불편'하지 않다는 것은 누군가의 '돌봄'이 없어도 괜찮다는 몸의 반응이다. 그런데 저녁에 날아온 한통의 문자와 사진(카톡)이 산통을 깨버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이는 캠핑장 풍경이었다. 갑자기 외로워졌다. 그 여인을 떠...
▶1995년, 출판사 '○○○○'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A4지 두 장 분량이었는데 치기 어린 분노가 빼곡했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을 읽고 '뭐 이딴 식의 글을 책으로 냈느냐'고 따진 것이다. 왜 화가 잔뜩 났는지, 그 정확한 이유와 근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글의 일정 대목에서 분명히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출판사 측은 답신하지 않았고, 내 저평가와는 달리 '외딴 방'은 문체미학의 정수라는 평단의 현란한 수사와 함께 이듬해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신경숙은 서울에서 고학하는 오빠들 뒷바라지를 위해 ...
▶혹자는 나를 워커홀릭이라고 말한다.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들인데 속내를 보면 칭찬이 아니라 비난이다. 그런데 뭐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뛰지 않고 걸었다는 점이다. 걷는 것은 느리지만 항상성(恒常性·한결같은 성질)이 있다. 반면 뛰는 것은 빠르지만 매우 유동적이다. 변심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누구나 목적지를 향해 뛰고 걷는다. 하지만 막상 그 목표에 다다르면 손에 남는 건 허무뿐이다. 돌아보건대,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난 늘 후회를 거듭하며 살았다. 그 '후회'를 후회하기 시...
▶'삼시세끼'라는 TV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나영석 PD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누구냐"고 물었다. '○○신문사'라고 하자 이내 비열한 신호음이 울렸다. "뚜뚜뚜뚜…." 나PD가 전화를 뚝 끊어버린 것이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웃음기조차 말라있었다. 청주가 고향인 PD이기에 나름 기대를 했건만, 왠지 기분이 더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최근 영화 '극비수사'를 봤다. '삼시세끼'에 출연했던 배우 유해진이 주인공이었다. 그도 청주가 고향이다. 세 끼를 꼬박꼬박 게걸스럽게 먹을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엘리베이터 방범용 폐쇄회로(CCTV)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꼬나본다. 아파트 현관을 나오니 또 다른 CCTV가 동서남북에서 열심히 몽타주를 스캔한다. 네거리 신호등 앞에서도, 지하철, 버스, 공공화장실, 마트에서도 여지없다. 너도나도 장착한 차량 블랙박스도 행인의 동선을 훔쳐보며 캡처한다. 밤새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난 네가 한일을 알고 있다'며 무작정 용의선상에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평균 80회 넘게 감시카메라(전국 450만대)에 찍힌다. 도둑놈, 강도, 성추행범을 잡겠다고 만들어놓은 '덫'에 모든 사람이 발가...
▶2005년 여름, 이란 루트사막의 기온은 섭씨 70.6℃까지 치솟았다. 이곳은 소금호수가 말라붙어 생긴 사막형 분지다. 과학자들이 생우유를 병에 담아 놔뒀지만 상하지 않았다. 너무 더워 박테리아가 번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한낮 기온이 30℃를 넘기면서 푹푹 찐다. 나무들도 쓰러지고 싶어 가지를 비틀고, 세상의 지붕은 땡볕에 익어버렸다. 이런 불볕에 마스크 쓴 이들이 거리마다 넘쳐난다. 눈만 빼고 폭 감싸고 다니는 건 이열치열이 아니라 생존본능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공포가 벌써 3주째다. 저마다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