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인공지능(AI) 때문에, 인간들이 불편해하고 있다. 더더구나 어떻게 지는지도 모르면서 졌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인간은 '묘수'에 신경을 쓰며 정석대로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의 '실수'나 '악수'로 여겨지는 수들을 역이용해서 승리한다. 인공지능의 계산이 인간보다 훨씬 멀리 내다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1초에 10만개의 '수'를 생각할 수 있으니, 인간의 1000배다. 머잖은 미래에 인간의 감정이, 감정 없는 인공지능에게 휘둘릴 것이라는 예측은 '직관'마저도 간파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일자리 절반...
▶금속성 촉수가 아침을 깨운다.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다. 딱딱한 손가락 관절이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는데 저리다. 그가 오늘 하루 마셔야 할 물의 양을 확인해준다.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서니 피부상태까지 체크한다. '알파고2'가 아침식사로 계란프라이를 세팅한다. 반숙을 싫어한다고 누차 얘기했건만 완숙과 반숙의 경계를 모른 체하고 있다. 정원에선 잔디 깎는 로봇이 잡초의 생장점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균일한 길이로 커터를 날린다. 자동차는 제 스스로 시동을 걸어 냉온의 온도를 맞춘다. 운전할 생각이 없는 난, 그냥 조수석...
▶소주를 마시며 멀미가 나는 것은 소주 때문이 아니다. 바람에 실려 온 멍게 향 때문이다. 멍게 굵은 놈의 배를 갈라 위새강과 아가미 주머니를 소주와 함께 입에 털어 넣는다. 입에서 바다가 출렁인다. 입수공으로 들어간 바다 향이 출수공으로 빠져나오며 향기에 무게를 싣는다. 쌉싸래한 향미가 술이 깰 때까지 입안을 감돈다. 여드름 자국 같은 돌기는 울퉁불퉁한 바다 조류를 견딘 '멍'이다. 물을 뿜어대는 모양이 남성의 생식기를 닮았다고 해서 우멍거지로도 불린다. 멍게 안주로 술을 마시면 다음날 머리가 ‘멍’하지 않다. ▶바다의 우유...
▶다섯 번의 감옥살이, 두 번의 교수 해직을 당했던 '시대의 지성인' 리영희(1929~2010년) 교수를 1998년 충북 증평에서 만났다. 그는 엘란트라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그에게 '세상을 쉽게 사는 법이 없느냐'고 선문답을 던졌다. 그는 대뜸 '세상이 쉽지 않은데 너무 쉽게 사는 게 문제이고, 빠르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 빠른 게 걱정'이라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의 엘란트라 핸들에는 '수신(守身)○○', 아니면 '수신(修身)○○'이라는 글귀가 한지(韓紙)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본분을 지켜 불의에 빠지지 않거나, 마음...
▶학창시절 7할은 자전거통학을 했다. 자전거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항상 앞선 풍경보다 뒤처졌다. 종아리의 근육은 찢어질듯 팽창했지만, 생각의 근육만큼 질기지도 않았다. 왜 두 팔과 두 다리의 동력이 필요한지 때론 지쳤다. 운전면허증을 따던 날, 난 대학 합격했을 때보다도 기뻐했다. '애마'가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고, 생애 최초 자력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당시 50만원을 주고 '포니2' 중고차를 샀다. 바퀴가 달려있어 자동차였지, 사실은 좀 더 빠른 '달구지'였다. 하지만 애인을 옆자리에 태우고 의기양...
▶영원한 동지는 없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 진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객들의 움직임이 사납다. 권력의 향배만을 따라 이동하는 월경(越境)이다. 한때 청와대서 잘나갔던 핵심 비서관은 청와대를 저격하고 있고, 야당 대통령의 금쪽 같던 ‘오른팔’은 야당을 향해 호통치고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모태가 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투신했던 어떤 원로와, 여야 협곡을 넘나들던 한 원로는 훈수정치에 여념이 없다. 이들에게서 검은 고양이도 보이고, 흰 고양이도 보인다. 잘못된 흑묘백묘(黑猫白猫)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담배연기가 창백하다. 새벽녘 조깅을 끝내고 한숨을 돌리는데, 왜 담배 생각이 간절한지 이율배반적이다. 간헐적 유혹이고, 치명적 자학이다. 더더구나 이른 아침, 공복에 넣는 연기는 본의 아니게 달다. 폐활량을 죽이는 생명단축의 연소가 살아 꿈틀거린다. 새벽의 색깔과 연기의 색깔, 그리고 몸이 치받는 모종의 색깔은 같다. 다소 과장된 듯한 이 욕망의 원죄를 따져보면 주체가 모호하다. 흡연의 가해자는 본인이다. 그 누구도 담배를 권하지 않았다. 어릴 적 뒷골목에 숨어든 짝패들이 살짝 연초(煙草)를 건넸지만 불을 댕긴 적은 없었으니...
▶아이들이, 아이들일 때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 내가 택한 건 송일국이나 추성훈이 해주는 ‘연예인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우유병을 삶고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가끔 와이프가 멋대가리 없는 아빠라고 평가하면 그때서야 섬으로 놀러갔다. 물론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도 설거지만 했다. 나의 아버지 또한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노동이 놀이였다.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는 농사일에 투입됐고, 잠시 틈이 나면 미루나무 위에 올라가는 게 놀이였다. 미루나무에서 내려다보는 절망의 높이는 서글펐다. 너무 외로워 나무에서 그냥 ...
▶초년고생(初年苦生)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단다. 이 상투적인 말은 알고 보면 헛소리다. 고생을 해서 이루는 성취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게 백배 낫다.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다는 건, 계란이 바위에게 까부는 격이다. 누군가는 '7포 세대'(연애·결혼 등 7가지 포기)라고 자조하고, 누군가는 '헬조선'(hell朝鮮:지옥 같은 한국)이라고 절규한다. 한번 약자(弱者)는 평생 약자라는 신분 고착화의 절망 담론이 우리 사회를 휩쓴다.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를 향해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개...
▶'응답하라 1988(응팔)'은 드라마가 아니라 삶이다. 마치 이삿짐을 나르다가 우연히 열어본 박스에서 옛날 일기장을 발견한 듯하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건 역설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삶이 살만하지 않다는 증거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가족과 이웃 간의 정, 부모들의 애환, 어려움을 함께 견뎌내야 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을 가슴 밖으로 소환해낸 페이소스(Pathos)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잊고 살았던 추억의 가치를 끄집어내어 위로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소한 풍경이 명치끝을 뻐근하게 한다. 이들에게 직업과 신분의 귀천(貴...
▶'여름새'는 이른 봄 남녘에서 날아와 번식하고, 가을에 남녘으로 간다. '겨울새'는 나그네새다. 북쪽 번식지와 남쪽 월동지를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통과한다. 떠돌이새(漂鳥)는 여름에 깊은 산지로 들어가 번식하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평지에 내려와 생활하는 조류다. 철새들이 이동하는 이유는 천적과 추위를 피해 번식하기 위해서다. 떼를 지어 이동하면 길을 잃을 확률도 줄어든다. 그런데 요즘 지구촌 철새들이 길을 잃어가고 있다. 철새가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집단의 죽음을 의미한다. 길은 곧 삶이고 방향이다. 머물렀던 둥지는...
▶아뿔싸, 한해가 속절없이 가는 게 허망했나 보다. 12월의 끝을 부여잡고, 고주망태가 됐다. 1월보다 먼저 취했고, 12월보다 빨리 혼이 나갔다. 귀로(歸路)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위기의 방아쇠를 당긴 듯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였다. 더욱 황망한 일은 ○○씨와 통화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아파트 화단으로 고꾸라진 거였다. 온몸이 흙 범벅이가 됐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흙 악취가 풍겼다. 지나가던 아가씨가 '괜찮냐'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또 손을 내밀었다....
▶ 요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양말을 걸어놓지 않는다. 깊은 밤까지 멀뚱멀뚱 기다리지도 않는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부모의 ‘거짓말’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산타클로스가 왕래할 굴뚝도 없다. 만약 굴뚝이 있다 해도 산타는 뚱뚱해서 굴뚝을 오갈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산타의 존재는 미증유(未曾有)다. 산타가 하루 동안 지구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려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해야한다. 지구촌 아이들이 20억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는 31억2500만㎞, 1초에 2600㎞를 달...
▶분설은 가루눈이다. 온도가 낮을 때 내린다. 분설은 끊기가 없어 잘 뭉쳐지지 않고, 옷에도 잘 묻지 않는다. 젖은 눈은 습설이다. 기온이 높을 때 내린다. 수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잘 뭉쳐진다. 진눈깨비는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는 것이다. 눈 같기도 하고, 비 같기도 하다가, 다시 눈도 비도 아닌 혼혈의 정경을 띤다. 꽃술이 비에 젖어 그 무게감을 못 이기고 떨어지는 꽃비 같다. 꽃비는 아름답지만 땅에 닿는 순간 진흙탕을 만든다. 때문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낙화(落花)하면 쓰레기다. ▶민들레(포공영)는 쓸...
▶올해도 어김없이 '끝'은 오고야 말았다. 12월은 마지막이고 절정이다. 절벽 끝에 외롭게 버티고 서서 밤하늘을 향해 길게 내지르는 늑대의 울음 같다. 그 속에 절대 고독과 생의 쓸쓸함이 더해진다. 그래서 눈물이다. 내일이면 전선(戰線)으로 떠나야하는 병사들이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마지막 밤, 막차를 놓쳐 정거장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밤의 ‘끝’은 두렵고 공허하다. '마지막'인줄 알면서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도 처연하고 비장한 것이다. '첫사랑'은 끝을 전제로 시작되고, '끝'인줄 알면서도 시작된다. 1988년, 첫사...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그러려면 겨울만의 온도가 필요하다. 물과 얼음 사이의 평형온도 0℃가 되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이다. 가을은 가을답게 떠나야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와야 한다. 그래서 빙점(氷點)은 액체를 고체로 만들겠다는 극한온도의 접점이다. 인간과 계절 사이에 흐르는 이 냉소적인 온도차는 결국 마음의 온도를 쥐락펴락한다. 차디찬 겨울은 바람의 온도로 알 수 있다. 필경, 바람엔 가을이 미처 담지 못한 여름날의 기억들이 묻어있다. 그래서 붉은 낙엽마저도 푸른 삼투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BC 4세기경 로마는 압제의 제국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민중은 절망했다. 차라리 세상이 종말하기를 바랐다. 유태인 목수의 아들 예수는 성난 군중에게 소리쳤다. “나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주려고 왔노라.”(마태복음) 예수는 메시아라기보다는 강성 좌파였고, 연설을 잘하는 정치가였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다. 예수는 지배계급의 돈줄이 되는 상행위에 분개해 상인을 추방했고 지배계급을 공격했다. 로마제국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객' 예수의 노골적인 비토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다.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힌 예...
▶난 때때로 외로움을 토로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닐진대 마음의 중력이 무시로 가볍다.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시 외딴집에 오래 산 DNA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절반을 이웃과 이웃하지 않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외로움은 지병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두려운 일은, 바로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배지가 아닌 곳에서 유배의 느낌으로 산다는 건 슬프다. 혈연공동체의 이 병약한 징조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자학일 뿐이다. 그리움의 감정은 습지대 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번 발...
▶○○씨 발인(發靷)에도 난 운동을 했다. 그들의 눈물이 겨울을 먹먹하게 할지언정 태연하게 뜀박질을 한 것이다. 그들의 입관은 그들만의 입관일 뿐이었다.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 또한 내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고, 난 나일뿐이니까. 내가 내린 평범한 결론은 비록 비루하고 야박하나 세상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가 내 눈물을 온전히 이해할까. 동시에 누가 그들의 눈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듯, 나 또한 그들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니, 동대동(同一)...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붕대로 가린들 투명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놈이 그놈인 것을 모두들 안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건, 욕망을 방해하는 갑갑한 시스템과 작별하는 일이다. 내가 무얼 보든, 무얼 먹든,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투명인간이 돼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걸 고르라면,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일과 은행(銀行) 터는 일일 것이다. 시험 문제지를 도둑질하고,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미워하는 작자를 혼내주는 일 따위는 후순위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