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작은 정원에서 바이올렛 꽃망울들이 햇살을 받고 송이송이 터지고 있다. 에메랄드빛에 가까운 퍼플색 꽃을 피워내는 바이올렛 토분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무는 것이 새 아침의 일상이 됐다. 바이올렛 꽃은 일 년 내내 피고 지는 걸 반복한다. 겨우내 정원의 휴면하는 식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꽃을 피우며 스산한 기운을 따뜻하게 품어주더니 봄빛을 흠뻑 받은 요즘 더 영롱하고 진한 꽃빛으로 안주인의 관심과 시선을 휘어잡는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세태의 유행이나 기류의 흐름에 휩쓸려 정신을 놓아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열정이 모자
공산무인 수류화개라더니 인간의 관심 없이도 계절은 바뀌고 봄꽃은 스스로 피어난다. 서로 더 잘났다며 표를 달라고 굽신거리던 정치인들은 당락이 확정되는 순간 얼굴을 바꿀 터이지만 흐르는 물과 피어나는 꽃들은 한 번도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시킨 적이 없다.마침 선거 다음 날이 삼짇날이어서 속세의 소음과 다툼을 벗어날 겸 가까운 이들과 화류회를 열었다. 혜원 신윤복의 ‘연소답청’에는 진달래 피어난 화창한 봄날 음식과 술을 준비하고 기생을 말에 태워 답청을 나서는 선비들의 풍류가 담겨 있지만 시대가 바뀐 지금 예전 같은 나들이는 언감생심이다
3월의 날씨가 변덕이다. 엊그제 종일 비가 얌전히 내리더니 비 그친 오늘 오후는 완연한 봄날이다. 추운가 싶더니 봄 햇볕과 바람, 꽃이 봄의 계절로 우리 곁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꽃 마중의 날이 온 것이다. 봄이 꼭 ‘복 받고, 상탄 느낌’이다. 봄은 이렇게 우리들의 춘심을 일깨운다.봄비에 나무 끝 새순이 연녹색으로 비쳐 보인다. 생명의 조화와 계절의 순응이 합주하는 봄이다. 동네의 들길을 걸으며 수목과 풀의 높이와 크기, 모양이 서로 다른 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한 봄맞이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긴 겨울 회색빛 색감을 뒤
낯선 사람의 등장에 아이들 눈망울이 더 초롱초롱하다. 무심한 척 시선을 아래로 떨구지만 흘낏흘낏 쳐다보는 얼굴빛에서 호기심과 경계심이 역력해 보인다. 올해 초등학교 저학년들과 몇 시간씩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개학을 앞두고 어린 새싹들을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 걱정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실로 들어선 첫날,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세월의 굴레가 아주 굵게 선을 긋고 있음이 감지됐다. 세상의 웬만한 시끄러운 소리가 나를 향해 쏟아져도 무던해질 수 있는 평정심과 구변으로 맞서오던 나였는데 천진한 아이들 앞에서만
지난해 입동을 조금 지난 무렵 금강 유역 음식문화 조사차 양산팔경 지역에 갔을 때의 일이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으므로 넓은잎나무 단풍의 절정기는 지나버렸지만 비단강이 빗겨 흐르는 강선대 절벽 위 소나무잎은 더욱 푸르게 느껴졌다.함벽정 가는 길 뒷골마을 쪽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한 농가에 대여섯 사람이 모여 김장이 한창이었다. 평상 위에는 물기를 빼느라 절인 배추가 쌓여있고 허리 굽은 노모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 채 썬 무와 갓에 찹쌀풀 등이 담긴 빨간 플라스틱 통에 젓갈을 조금씩 넣어가며 김칫소 만들기에 여념이
동네 골목길을 적시는 2월의 봄비가 내린다. 봄의 날씨가 찬 기온으로 늦겨울을 넘나든다. 비와 진눈개비로 변화하는 날씨는 봄이 온다는 계절의 순환이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며 내리는 봄비는 자연과 사람에게 수많은 사연과 인연을 만들 것이다.동네를 가르는 골목길의 수목에서 가녀린 듯 맺힌 빗방울을 보았다. 봄의 길목에서 보는 방울진 눈요기였다. 떨어질 듯 반원의 매달림이 우리의 삶 같이 보였다. 길가의 노란 잔디 속에서 자세히 보면 파란 싹이 촉수를 뻗었다. 우리가 느끼는 봄추위보다 먼저 새싹과 푸릇함이 보인다. 오늘이 정월 대보름을
천방지축 하룻강아지다. 애교인지 앙탈인지 꼬리를 살랑대며 거실을 비호같이 몇 바퀴 내달리는 것으로 아침이 왔음을 알린다. 말 수 없던 노부부의 고요하던 아침이 첫새벽부터 수선스러워지고 웃음소리가 나는 건 순전히 이 작은 애물단지가 등장한 날부터이다.작년 여름, 십 수 연간을 한 울타리에서 살던 애완견 한 마리를 무지개다리로 건네 보내며 이별이 너무 쓰린 상처가 되어 다시는 생명 있는 것들을 품지 않으리라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을 꼭 닮은 애물단지가 또 들어왔다. 조막 둥이 만한 이 악동은 나를 지에미로 아는지 눈만 뜨면 하루 종일
동춘당 종가의 음식을 찾아 대전역에 내리는 순간 아련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시속 300km를 넘나드는 고속열차가 달리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1970년대 어느 여름의 일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방학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삼촌집에 가게 되었다. 삼촌은 서울에 올라가 집도 사고, 자가용도 있고 그리하여 이제는 성공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분이다.꼭 직접 찾아가야 할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기억에 없지만 당시는 특별한 볼 일 없이도 삼촌은 물론 문중 일가들까지 서로 찾아가고 신세 지던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정월의 어느 날 타 지방의 작은 시골 책방을 찾았다.반시간의 여행길에 나는 들떠 있었다. 새로움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책지기의 안목과 어떠한 주제로 나를 맞을지 궁금하다. 코드가 맞는 분들과 대화는 신선한 소통의 마음 열림이기 때문이다.지난 년도를 거슬러 문학적 계획과 실행 안에서 나는 과연 어떠한 감성으로 맞았는지 생각을 반복하였다. 그 중 글공부 수강생이 매번 편지지에 손 글씨로 수필을 쓰는 분이 있었다. 글도 좋았으며 생각의 정리가 틀리지도 않고 써내려간 문장 또한 일품이었다. 컴퓨터 타자가 아닌 손으로 써내려간 글씨가 정성
비가 온다. 낮부터 내리던 비는 밤이 이슥도록 그칠 줄 모르고 자박자박 겨울밤을 적시고 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지만 찬 계절답지 않게 순한 빗줄기는 이슥토록 창문을 두들긴다. 절기로 대한이 지났고 입춘이 머지않았으니 오늘 밤 내리는 비는 봄을 마중하는 상서로운 비라 해야 하나.겨울날에는 그날의 기온과 날씨 변화에 따라 마음도 흔들린다. 하얀 눈이 흩날릴 때면 공연스레 설렘이 인다. 기약 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묻혀버린 파릇하던 청춘의 날들이 선물처럼 불쑥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아니한 막연한 회상에 젖어 보기도 한다. 하
모처럼 만난 지인과 냉면을 먹기로 했다.추운 겨울에 웬 냉면이냐고 할지 모르나 냉면이 원래 추운 지방에서 한겨울 얼음 동동 뜬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데서 시작된 음식이니 동지 섣달에 먹는 냉면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냉면 매니아를 자처하는 우리는 가늘고 쫄깃한 면발에 달콤새큼한 육수가 어우러지는 시중의 일반적인 냉면보다는 메밀로 뽑아 투박한 면발을 깔끔한 육수에 만 슴슴한 맛의 이북식 냉면을 좋아한다. 메밀의 향과 식감 그리고 담박한 육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마침 청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통 평양냉면으로
갑진년(甲辰年) 새해 새날에 대청호 인근에서 해맞이를 하였다. 오늘과 내일, 지난 1년과 새해의 구분이지만 모두의 마음가짐은 다르다. 선을 긋는 일(日)과 시간의 구분은 인간이 만든 척도에 불과하다. 자정에 1초를 사이에 두고 환희와 해를 보며 기원적 각오를 담는다. 아침공기는 차갑지만 눈은 빛나고 얼굴은 상기된 표정으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같을 것이다.정월의 새날이 1일 이듯 사물의 순서와 인간사 생각 또한 처음이 존재한다. 우리 삶의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앞에는 시초(始初)가 있고, 어떤 일이건 발단
눈이 내린다. 매봉산자락 기슭에서 훅하니 불어오던 바람결에 가랑눈이 따라왔나 보다. 분분히 날리는 눈이 언뜻 춘삼월 낙화와 같다.소담스러운 눈송이도 좋고, 바람 타고 흩날리는 풋눈도 그냥 맥 칼 없이 좋아서 뛰어다녔던 날이 있었다.이십여 년 전 첫눈 오던 날이 문득 생각난다. 어머니가 홀연히 하늘길에 오르시고 두어 달 뒤 첫눈이 왔다.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두문불출하시며 말수를 줄이던 때라 첫눈으로 말거리를 찾았다 싶어 아버지께 달려갔다. 공허한 기운이 감도는 거실에서 아버지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체 눈을 감고 계셨고 티브이만
12월 들어서면서 하루가 멀다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각종 송년 모임의 연속이다. 모이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적 유대감이 만들어낸 끼리끼리 문화일 것이리라. 소소한 친구 모임, 선후배 지역 모임도 많고, 각 기관이나 단체의 한해를 결산하는 시상식 행사가 특히 이목을 끈다. 총선을 앞둔 상황이라 선심성 수상자도 있을 것이다. 한 단체장의 수상자가 한두 명이 아니고. 적게는 예닐곱 명에서, 많게는 십여 명이 공동 수상을 하는 경우는 그 상의 가치를 가늠하기 힘들다. 어떤 문학상은" 때 되면 누구나 받는 상"이라는 수상자의 가벼운 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베란다에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한 할머니가 하얀 승용차를 향해 두 손 모아 절하고 있었다. 네 바퀴를 정성스레 어루만진 후 절을 하고, 범퍼를 자식 엉덩이를 두들겨주듯 다독거리고는 연신 허리를 굽혔다. 사찰이라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다지만 아파트 주차장에 서 있는 승용차를 두고 일어나는 일이니 내겐 관심사였다.조금 있으니 중년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할머니와 몇 마디 나누고는 할머니가 정성스레 절을 올리던 그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차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네 살배기 손주의 어린이집 알림장을 훑어보다 웃음이 터졌다. 아이의 하루 생활이 담겨 집으로 보내오는 알림장에 보육교사가 쓴 글을 보니 천진난만한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린아이들은 또래와 상호작용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가도 금세 토닥거리는 일이 다반사란다. 그 상황을 아이들끼리 잘 풀어나가는 것도 배움의 한 과정이기에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교사가 굳이 개입하지 않는단다. 상황 전개는 이랬다. 손주와 친구가 블록 놀이를 하다 서로 같은 걸 집어 들고 실랑이를 벌였다. 또래의 소견으로 양보보다는 쟁취하려는 의도가 먼저 앞섰는지
요즘 주부들을 만나면 "김장했냐"는 인사로 안부를 나눈다. 이럴 때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언제 김장할지 일정을 잡고 아이들도 부르고, 어릴 적 부모님의 김장하는 날처럼 가마솥에는 장작불을 피워 구수한 두부도 만들고. 돼지고기도 듬뿍 삶아 가까운 이웃들과 거하게 잔치하면 좋은데 아파트 생활이 그리 쉽지 않다.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주거 방식이 바뀌면서 좋은 생활문화도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쉽다.몇 년 전 양쪽 어깨 시술을 하고 난 후부터는 주변에서 가져다주는 김장에 부족한 만큼 절임 배추를 사다가 양념에 버무리는 것이 전
이천 설봉산 자락을 느릿느릿 오른다. 산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길목이 스산하다. 가을옷으로 갈아입은 잎과 열매들이 생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며 끝을 향한다. 나는 이맘때가 되면 나뭇잎의 조락을 보며 습관처럼 가슴앓이한다. 이유 없이 서글픔이 밀려오고, 부질없는 상념을 되새김질하다 보면 내 마음도 따라 술렁거린다.통나무 계단을 오른다. 낙엽 한 잎이 발밑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떨켜’가 밀어낸 흔적이다. 떨켜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서 수분 통로를 차단하며 만들어지는 특별한 세포층을 말한다. 산기슭엔 떨켜가 밀쳐낸
사방을 둘러봐도 곱지 않은 곳이 없다. 꽃은 분명 아니건만 그윽하게 아름다운 풍경들이 세상천지 곳곳에 내렸다.나무마다 지난여름 땡볕을 견디고, 광풍을 지나온 아픈 궤적을 단풍이란 흔적으로 물들이는 겸허한 입명을 받아드리는 계절이다. 나도 같은 계절과 같은 시간을 함께 달려왔는데 지금쯤이면 내 그림자도 저리 곱게 비추어질까. 가을빛이 완연한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니 나의 형상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아 문득 움츠러든다.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내가 지나온 시간을 뒤집어 보니 참 숨 가쁘게 달려왔다. 깜냥이 되는지 재보지도 않은 채
퇴근하면 습관처럼 우편함을 들여다본다. 딱히 기다리는 소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신간 서적을 보내주는 작가들은 얼굴을 마주한 듯 반가움이 앞선다. 하지만 한두 번 안면이 있는 상대가 보내는 축제나 행사의 초대장은 조금 불편할 때도 있다. 참석하려니 다른 일정과 겹치기도 하고, 주말 휴식이 필요한 데 고민이 되는 경우도 있다.지금 전국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축제가 국민을 호객하고 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강력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쟁점이 되는 시기에 문화 예술이 민심을 긍정적인 정서로 이끄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성공한